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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역사 이야기

정치가 카이사르, 정복자 카이사르, 독재자 카이사르

by 브라보 오스카 2024. 2. 18.

▶  가이우스 울리우스 카이사르 (Gaius Julius Caesar, BC100년-BC44년)

1. 정치가 카이사르

가이우스 울리우스 카이사르 (Gaius Julius Caesar, BC100년-BC44년)

율리우스 씨족의 아들이었는데 그의 숙부인 마리우스는 민중파로 그의 부하였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벌족파와 대립하게 되어 결국 내전으로 치닫았다. 한때 마리우스가 정권을 잡아 민중파가 득세하고 술라는 독재관에 임명되는 가운데 카이사르는 평민 약혼녀인 코수티아와 파혼하고 사제직 선출을 위해 민중파 영수였던 칸나의 딸 코르넬리아와 결혼한다. 이후 BC82년 술라의 벌족파가 내전에서 승리하여 율리우스는 숙청명단에 올랐으나 간신히 죽음을 면하지만 코르넬리아와의 이혼을 거부하여 잠적하기에 이르렀다.

도주하던 중 마르쿠스 미누키우스 테르무스 휘하에서 군인으로 근무하면서 동방 원정을 떠나 그리스 미틸리니 공성전에서 승리를 거둬 시민관 지위를 획득하였다. 비튀니아 임금 니코메데스 4세의 함대를 확보하는 임무를 맡던 중 카이사르는 궁정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어 왕과 동성애 염문이 돌았으며, 이후에도 이 소문은 계속 그를 따라다녔다.

카이사르는 뛰어난 웅변가였다. 그는 수사학을 완성하기 위해 기원전 75년에 그는 로도스 섬으로 유학하여 일전에 키케로를 가르친 바 있는 아폴로니우스 몰론 밑에서 공부하였다.

그러던 중 에게해를 지나던 율리우스는 킬리키아 해적에게 납치당해 도데카니사 제도의 파르마쿠사 섬에 갇히게 되었다. 잡혀있던 율리우스는 거만한 태도로 일관하며 나중에 해적들을 처형하겠다고 공언하였는데 다들 이말이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해적들이 율리우스의 몸값으로 20탈란트로 잡자 그 스스로가 50탈란트로 높여버리고 몸값이 지불되자 율리우스는 풀려난다. 그리고 곧장 배를 모아 해적들을 잡아 페르가몬 감옥에 가둔다. 당시 아시아 총독이었던 마르쿠스 융크투스는 카이사르의 요청이었던 해적들의 처형을 반대해 노예로 팔고 싶어했다. 이에 카이사르는 해안으로 돌아가 해적들을 십자가형에 처했다.

뛰어난 웅변가였던 카이사르는 법무관으로 근무하였다. 그러던 중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 속주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이베리아로 떠나게 된다. 그러나 막대한 빚을 지고 있던 터라 당시 로마 갑부였던 마르쿠스 리키니오스 크라수스의 도움을 받았다. 히스파니아에서 칼라이키족과 루시타니족을 정복하여 그의 군대에게서 임페라토르(최고 군사령관)로 호칭되며 존경을 받고 총독직을 마쳤다.

로마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와 함께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크라수스는 이미 카이사르가 빚을 지고 있었으므로 정치적으로 동맹관계에 있었고 크라수스와 함께 집정관을 지냈었으나 정적이었던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망누스를 카이사르의 편에 서게 만들었다. 이는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의 숙원이었던 자신의 퇴역병들에게 동방의 농지를 배분해 주는 것을 도와줌으로써 가능했다. 정적이었던 두 사람은 카이사르로 인해 화해하게 되고 세사람은 이른바 비공식적 정치체제인 1차 삼두정치를 만들게 되면서 로마를 장악하게 된다. 또한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확실하게 자기 편으로 만들고 그의 신임을 얻기 위해 그의 딸인 율리아와 결혼하면서 관계가 공고해 졌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음해로 인해 갈리아로 속주 총독의 자격으로 밀려난다. 이는 그의 정부 세르빌리아의 설득이 컸다. 카이사르는 갈리아로 가려하지 않았으나 세르빌리아가 그를 설득했다. 세빌리아는 로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성 정치가였다고 한다.

2. 정복가 카이사르

갈리아 정복에 나선 카이사르는 게르마니아와 브리타니아 영토를 휩쓸면서 연전연승했다. 당시 갈리아는 부족 형태로 흩어져 있어 조직적이고 통합적인 대응이 안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알레시아 정복에 복병이 나타나니 갈리아족을 통합하고 힘을 결집한 아르베르니족(Arverni)의 베르킨게토릭스의 저항에 막혔다. 베르킨게토릭스는 게릴라 전법에 피해를 입은 카이사르 군대는 알레시아 지역에 14km에 달하는 장벽을 세우고 이들을 고사하려 했다. 하지만 베르킨게토릭스의 갈리아 지원군이 26만의 대군을 이끌고 와 베르킨게토릭스의 알레시아를 포위한 카이사르 군을 다시 포위한다. 이를 막기 위해 카이사르는 다시 외벽을 세운다. 카이사르의 뛰어난 병법으로 갈리아 군대 및 베르킨게토릭스의 군대를 전멸시킨다. 이 전투를 일컬어 BC52년 알레시아 전투라 이른다. 이 전투에서 결국 베르킨게토릭스는 카이사르에게 항복하고 실질적으로 카이사르의 로마군은 갈리아를 정복하게 이른다. 결국 BC58년에 시작한 갈리아 전쟁은 BC51년에 끝이 난다. 이 전쟁으로 로마군은 300만명의 군과 싸워 1백만이 죽고 나머지는 노예가 되었으며 300개부족이 복속되고 800개 도시가 파괴되었다고 한다.

갈리아전쟁으로 서유럽에 로마의 문화가 전파되고 갈리아 전역을 갈리아 코마타라는 하나의 속주로 두고 이는 이후 카이사르가 내전을 승리하게 되는 기반이 되었다. 갈리아 정복으로 로마의 영토는 50만km2까지 넓혀져서 로마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하게 되었다. 로마의 군사들은 갈리아 영토에 정착하게 되는데 이때 생겨난 도시가 파리, 제네바와 같은 대도시로 된 것이다. 카이사르는 3인칭 시점으로 정복의 일지를 써서 로마로 보내졌는데 이것이 갈리아 정복기이다. 갈리아 정복기로 인해 로마인들의 인기를 독차지하였다.

한편, 크라수스는 카이사르의 인기를 시기하여 독자적으로 군사 작전을 폈는데 동방의 파르티아로 원정을 떠났다. 크라수스는 돈은 많았으나 시민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군사적 업적이 필요하여 정복 원정을 떠난 것이다. 그러나 크라수스의 원정은 참패를 거두면서 포로로 잡혀 죽게 된다. 그는 그의 욕심을 풍자한 파르티아인에게 금을 녹여 입에 집어 넣으면서 녹인 금을 삼켜 죽게 되었다.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정복하면서 인기가 높아지자 이를 시기한 폼페이우스는 임기가 끝난 집정관의 자격으로 원로원의 승인없이 게르마니아로 진군한 카이사르를 재판에 회부하게 되었다. 카이사르의 딸인 율리아가 아이를 낳다 죽게 되고 카이사르의 정적인 퀸투스 메텔루스 스키피오의 딸 코르넬리아와 결혼하게 되어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는 정적으로 변하면서 결국 삼두정치는 막을 내린다. 브루투스는 기꺼이 폼페이우스 편에 섰는데 이는 그의 어머니 세르빌리아가 카이사르의 정부이면서도 그녀가 승자의 편에 서라는 가르침을 받게 된 이유에서다.

카이사르는 8년간의 갈리아 원정을 마치고 금과 보물을 갖고 로마로 귀환하려 했으나 자신이 로마로 돌아가면 군대가 해산되고 재판에 회부되어 모든 영향력을 잃게 될 것을 우려해 자신의 1개 군단인 제13군단 4500명을 이끌고 BC49년 1월 12일 루비콘강을 건너 로마로 무력 쿠데타를 일으키려 진군했다. 이로써 로마의 내전이 시작되었고 그 유명한 루비콘강을 건너다(Crossing the Rubicon)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그리고 플루타르코스는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아테나이의 극작가 메난드로스의 작품에 나오는 구절인 "주사위를 던져라!"를 그리스어로 인용하였다고 썼다. 수에토니우스는 이 문장을 라틴어로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라고 썼다.

폼페이우스는 로마를 버리고 남쪽인 브린디시움으로 향했다. 그는 그리스로 가서 히스파니아, 아프리카 등지에 있던 로마 군대를 집결해 카이사르와 대결하려 했다. BC48년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쫓아 브린디시움으로 향했는데 3개월간 11000명의 군단을 거느리고 50km까지 추격했으나 이미 폼페이우스는 브린디시움을 떠나 그리스로 건너 간 상태였다. 브린디시움에서 직접 배를 만들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함께 1진과 2진으로 나누어 아드리아해를 건너 폼페이우스가 있는 그리스로 향했다.

디라키움 공방전에서와 같이 폼페이우스 진영이 승리를 거두기도 했으나 결국 최종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 군을 격파하면서 폼페이우스는 알렉산드리아로 도망갔다. 이 전투는 1시간정도 밖에 소요되지 않은 카이사르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폼페이우스는 알렉산드리아의 통치자 프롤레마이오스13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내전에서 승리하면 프롤레마이오스13세와 권력 다툼을 벌이고 있던 누나이자 왕비인 클레오파트라에 대항해 싸워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13세 임금을 조종하는 궁중관료들의 명령을 받은 전직 로마군 장교에게 살해당하였다. 폼페이우스를 쫓아 알렉산드리아로 건너간 카이사르는 프롤레마이오스13세가 선물로 보낸 폼페이우스의 목을 보고 한때 자신의 정치적 동지이자 후견인이었던 그를 처참하게 죽인 프롤레마이오스의 반대편인 클레오파트라편에서서 알렉산드리아의 내전에 관여하게 된다. BC47년 카이사르 군대는 나일강 전투에서 프롤레마이오스 군대를 격파하며 클레오파트라를 통치자로 올렸다.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클레오파트라와 실질적인 부부관계를 유지하며 지냈으나 클레오파트라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로마로 돌아가겠다고 한다. 이후에도 14년간 클레오파트라와 연인관계를 유지하였는데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에도 가끔 방문하여 카이사르의 별장에서 기거하기도 했다.

3. 독재자 카이사르

전권을 잡고 돌아온 카이사르는 BC48년말 독재관으로 스스로를 임명한다. 이후 BC47년초 중동 지역에서 폰토스 왕 파르나케스 2세를 젤라 전투에서 절멸시켰다. 과거 폼페이우스가 이런 형편없는 적들과 그리 힘들게 싸웠냐라고 조롱하기도 했고 이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로마의 원로원에 보낸 편지에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라고 적었다.

BC45년 카이사르는 히스파니아로 건너가 반 카이사르세력을 문다 전투에서 격파하여 내전에서 최종 승자가 되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로마의 건국일인 4월 21일에 20일간 대대적인 축제와 경기가 이뤄지게 되었다. 카이사르는 BC46년 기존 6개월의 독재관 임기를 10년으로 연장하고 2년 동안 복지정책, 달력 개정, 수도 재개발, 카르타고와 코린토스의 재건, 금융개혁, 원로원 체제 약화, 교통 규제, 갈리아 키살피나 주민에게 시민권 지급, 치안 대책, 해방 노예 등용 등 각종 개혁을 추진하였다. 또한 카이사르는 원로원과 민회로부터 종신 독재관에 임명되어 사실상 공화정은 붕괴하고 제정이 실시되게 이르렀다.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에 와서 카이사르에게 아들을 주고 간다. 그의 이름은 카이사리온이고 그녀와 그의 아들의 등장은 카이사르의 옆에서 보좌하던 브루투스와 그의 어머니이자 카이사르의 정부였던 세르빌리아의 불안을 사게 했다.

카이사르는 다시 동방 원정을 준비한다. 폼페이우스가 원정에 실패한 파르티아 정벌을 위한 것이다. 카이사르의 파르티아 원정이 성공할 경우 카이사르의 힘이 더욱 커질 것을 두려워한 원로원은 그를 암살하기로 계획하고 BC44년 3월 15일 원로원 회의에서 부르투스등 일당 60여명에게 23번의 칼을 맞고 죽는다.

카이사르는 무덤이 없다. 그가 죽고 포로 로마노에서 화장을 하고 있었는데 화장이 끝날 무렵 비가 쏟아져 그의 유해가 비에 씻겨 내려 갔다고 한다.

카이사르가 죽자 유언대로 그의 조카인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가 그의 후계자가 된다. 그의 유언에는 옥타비아누스가 자기보다 먼저 죽으면 브루투스가 그 자리를 이어받아 상속자가 된다고 하였다. BC43년 그는 카이사르 암살 세력인 데키무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와 싸우기 위해 안토니우스 그리고 카이사르에 충성하던 기병 지휘관 레피두스 세 사람의 제2차 삼두 정치가 공식적으로 결성되었다. 삼두 정치는 기원전 42년에 공식적으로 카이사르를 '율리우스 신'(Divus Iulius)으로 신격화하였으며, 그에 따라 옥타비아누스는 '신의 아들'(Divi filius)이 되었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이집트로 건너가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여 이집트의 부와 영향력을 가지고 로마를 지배하려 하면서 옥타비아누스와 대립하게 된다. 옥타비아누스는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을 격파하면서 내전을 종결짓고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라는 명칭으로 황제가 된다. 카이사르가 죽고 나자 아이러닉하게도 공화정이 무너지고 황제 1인이 통치하는 제국으로 된 것이다. 옥타비아누스에게 패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같이 자결하게 된다. 클레오파트라의 아들 카이사리온은 클레오파트라가 죽고 나서 2주간 이집트의 왕이 되었으나 결국 반대 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다. 당시 그의 나이 17세였다.

Daddy's Point of View ========================

정말 카이사르만큼 서양사에서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 있을까? 시오노 나나미는 그가 키는 컸지만 매우 못생긴 인물이었을 거라고 추측해. 하지만 그러면서도 여자들에게 항상 인기가 있었고 말을 아주 잘했다고 해. 그렇기 때문에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던 모양이지. 왠지 느낌에 프랑스 영화 향수에 나오는 특별 향수를 바르고 다닌 건 아니었을까? 남자건 여자건 그만의 특별한 매력을 가진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인 것 같다. 그리고 그가 웅변술을 배우기 위해 그리스로 유학 가서 수사학을 전공하지 않았겠니. 얼마 전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 책을 사서 읽어보려 했는데, 한번 봐야겠다. 그도 말을 잘하고 싶었나 봐. 너희들도 수사학을 한번 공부해 보는 것을 아빠는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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