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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역사 이야기

유대인-아랍인 갈등, 이스라엘 건국, 이어지는 대결 구도

by 브라보 오스카 2024. 2. 20.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중동 #하마스 #디아스포라 #시오니즘 #벨푸어선언 #후세인맥마흔선언 #PLO #인티파다 #헤즈볼라 #중동전쟁 #6일전쟁 #욤키푸르전쟁 #수에즈분쟁 #오슬로협정 #현대판십자군전쟁 #가자지구 #가나안

23년 10월 7일 오전 6시 30분 팔레스타인의 하마스가 이스라엘에 5천 발의 로켓포를 발포하며 이른바 '알 아크사 홍수' 작전을 개시하고 이스라엘은 피의 복수를 부르짖으며 전쟁이 개시되었다. 지금이 2월 말이 다 돼가 넉 달이 넘었는데 아직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왜 중동에서는 이렇게 불안한 정세를 보이는 것일까? 거기에는 종교와 경제적 이유가 깔려 있는데 종교적인 이유도 있지만 보다 큰 원인은 외교적인 문제로 인한 불화가 더 크다. 종교적 문제로 봤을 때,이슬람과 기독교 유대교는 뿌리는 같으나 서로 배척한다. 이 세 가지 종교에 대해서는 다음 번 스토리에서 알아보도록 하자.

▶ 팔레스타인 영토 주도권 변화

우선 이 지역은 유대인이 차지하고 있는 이스라엘이 있고 나머지는 다 아랍 민족이 차지하고 있다. 아랍 민족은 사우디아라비아, 리비아, 이란, 이라크 등 여러 나라의 형태를 이루고 있어. 아랍 민족은 무슬림 국가, 즉 이슬람을 신봉하고 있는데, 그게 반해 이스라엘만 생뚱맞게 유대교다. 왜 이런 형국이 그려졌을까? 왜 이스라엘은 주변 아랍 국가들과는 왜 맨날 치고받고 싸우는 것인가? 옛날의 가나안 땅, 지금은 팔레스타인 지역,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는 이 지역의 끊임없는 분쟁은 1차 세계대전(1914-1918)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 유대인-아랍인 갈등

1차 대전 이전에는 팔레스타인 지역을 포함한 대부분의 아랍지역을 오스만제국이 통치하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은 아랍 민족 국가라 할 수는 없으나 이슬람 국가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영국, 프랑스 등의 연합국은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의 동맹국과 전쟁을 벌였다. 이때 오스만제국은 동맹국의 편에 서게 된다. 오스만 제국은 힘이 매우 약해진 상태였지만 아랍 민족들은 함부로 대항하지 못했다.

그래서 전쟁이 한창이던 1915년 10월 연합국 측의 영국은 아랍인들을 꼬셔서 오스만제국을 상대하는데 아랍 민족이 도와주면 팔레스타인 지역을 포함한 아랍지역에 아랍 민족의 국가를 세우는데 지원해 주겠다고 했다. 영국의 외교관이었던 이집트 주재 고등 판무관 헨리 후세인과 아랍 민족의 지도다 알리 빈 후세인은 이러한 내용으로 3달 동안 10통의 현지를 주고받았다. 이것이 후세인-맥마흔 선언 또는 편지 (McMahon Hussein Letter, 1915)라고 한다.

그러나 전쟁은 계속되었고 독일 등 동맹국의 기세는 쉽게 꺾이지 않았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연합국은 돈이 모자라게 되었다. 그래서 영국은 1917년 당시 최대 현금왕 로스차일드 가문에게 손을 벌리게 되는데 로스차일드가 바로 유대인이라는 사실이다. 로스차일드의 역사에 대해서 쑹훙빙이 쓴 '화폐전쟁'을 읽어보면 자세히 알 수 있다.영국의 외무장관 아서 벨푸어와 월터 로스차일드 간에 또 다른 약속이 편지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를 영국 외무장관 이름을 따서 벨푸어 선언(Balfour Declaration)이라 불리게 되었다.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서 민족적 고향을 건설하겠다는 것을 지지한다는 내용인데, 맥마흔-후세인 선언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내용이다. 참고로 로스차일드 가문의 재산은 재산 현재 가치로 약 5경원 정도였다고 한다.

영국은 끝까지 양아치 짓을 멈추지 않았다. 사실 맥마흔-후세인 서신과 벨푸어 선언 사이인 1916년 프랑스와 사이크스 피코 협정 (Sykes Picot Agreement 1916)을 맺는다. 프랑스 외교관 프랑수아 조르주 피코와 영국 외교관 마크 사이크스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졌는데, 이 협정은 오스만 제국의 아라비아반도 외 아랍 지역을 미래의 영국과 프랑스 지역으로 분할하겠다는 내용이다. 영국은 바다와 요르단 강 사이 해안 지역, 요르단, 이라크 남부, 하이파, 아코 등의 항구 지역을 얻었으며 지중해에 대한 점유권을 가지게 된다. 프랑스는 터키 남동부, 이라크 북부, 시리아, 레바논 지역을 얻었고 러시아 제국은 이스탄불, 터키 해협, 아르메니아 빌라예트를 나눠 갖기로 하였다.

1917년 10월 혁명으로 볼셰비키가 이 협정을 폭로하면서 "영국은 당황했고 아랍은 경악했으며 터키는 기뻐했다."라고 전해졌다.

1차 세계대전 이후 팔레스타인 지역은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영국은 아랍인이 아닌 유대인에게 이 땅을 주게 되었다. 왜냐면 유대인의 자금력이 아랍의 민족성보다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 역시나 여기서도 돈이 핵심이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지역은 대부분 아랍인들이 살고 있었으나 영국에 의해 유대인들이 속속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에, 2차 세계 대전이 터지면서 독일 나치 등으로부터 핍박받는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대거 돌아오게 된다. 영국의 보호령에 아랍인과 유대인이 공존하니 조용할 리 없었다. 이들은 서로 싸우기 시작하게 되면서 영국은 골칫거리로 생각하고 전쟁이 지난 직후 1947년 이곳을 그냥 버려두고 뜬다. 아랍인과 유대인의 싸움은 더욱 격해졌다. 그리하여 이곳의 질서를 잡으려고 개입한 기구가 국제연합, 즉 UN이다. UN은 팔레스타인 지역 분할 안을 내놓았고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지역에 아랍인들을 없애버리는 인종청소를 하기 시작하게된다. 아랍인은 보이는 대로 죽였고 그들이 살고 있는 마을을 소멸시켰다. 당시 지금은 사용이 금지된 2천도 이상의 고열을 발포하여 사람의 뼈까지 녹이는 소이탄을 사용했다 하여 국제적 지탄을 받기도 했다. 이스라엘은 공포 분위기 조성을 위해 확성기로 아랍인들의 비명소리, 절규 소리를 틀어주면서 마을 곳곳을 다녔다고 한다.

2. 이스라엘 건국

그리고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은 이곳에 개국을 선포하게 된다. 당연히 아랍인들의 반발이 거셌고 중동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이스라엘의 건국 선포 이틀 뒤인 5월 16일에 이집트를 필두로 레바논, 파키스탄, 사우디아라비아, 예멘, 모로코 등 주변 아랍 국가 연합이 이스라엘로 진격한다. 1차 중동전쟁이 발발한 거야. 약 반년 동안 전쟁을 치렀지만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 군대에게 처참하게 패배하게 되어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78%를 장악하고 전쟁의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스라엘이 장악하지 못한 곳이 크게 두 군데가 있었는데, 이집트와 맞닿아 있는 지중해변의 가자 지구를 이집트가 장악하고, 이스라엘의 동쪽이며 요르단강 서쪽에 있는 서안지구는 요르단이 장악하게 된다.

전쟁은 끝이 났으나 여전히 소규모 게릴라전은 지속되었다. 그러던 중에 수에즈 운하를 두고 영국과 프랑스가 이권 개입에 나서게 돼서 2차 중동전쟁 또는 수에즈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이집트 영토 내에 있으나 당시 영국과 프랑스에서 소유하고 있던 수에즈 운하를 1956년 이집트 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가 일방적으로 국유화를 시켜 버렸다. 이에 반발한 영국과 프랑스에서 이스라엘을 꼬드려 이집트를 침공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스라엘이 먼저 이집트 영토인 시나이반도를 침공해.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이스라엘 군대는 이집트 군을 압도할 만큼 강력했다. 이집트는 이에 대응하여 수에즈 운하를 시멘트로 발라버려 운행을 중단했다. 이로 인해 유럽에서는 석유 공급에 차질을 빚게 되었다. 미국은 영국 프랑스에게 수에즈 운하를 이집트에게 돌려주라 하고 이스라엘은 군대 철수를 하게 만드는 중재 역할을 하게 되면서 전쟁은 일단 끝나게 된다.

1964년 팔레스타인해방기구(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 PLO)가 가자 지구와 서안지구에 결성이 된다. PLO는 주변 아랍 국가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PLO를 응징한다는 차원에서 가장 사이가 안 좋은 이집트 영토인 시나이반도를 다시 침공했다. 압도적인 군사적 우세로 이 전쟁은 단 6일 만에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3차 중동전쟁이 발발했고 6일간의 전투는 압도적인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그래서 시나이반도, 가자 지구, 서안지구를 다 차지하게 된다. 팔레스타인인들의 난민화가 시작되었고 PLO는 약화되었다.

그런 와중에 PLO는 그들의 존재감을 보여주기 위해 1972년 뮌헨 올림픽에 침입하여 이스라엘 선수 9명을 납치하고 이스라엘에게 팔레스타인 포로 200명의 석방을 요청했다. 이스라엘은 이를 거부하여 결국 PLO는 9명의 이스라엘 선수들을 살해하여 전 세계에 충격을 줬다. 그리고 1982년에는 이스라엘 군대가 PLO 소멸을 명분으로 PLO의 근거지였던 레바논 베이루트로 진격하게 된다. 당시 레바논의 기독교 우익단체 카타이브는 그들의 당수이자 대통령인 바사르 게마엘의 암살 주체라 생각하고 이에 대한 보복의 명분으로 이스라엘 연합군에 합류했다. 이후 PLO의 게마엘 암살과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으나 카타이브는 팔레스타인 난민을 몰아붙였다. 그들은 베이루트에 형성되었던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포위하고 민간인 군인 가리지 않고 무차별 학살을 자행하였다. 약 3천5백 명이 사망하였다고 한다. 그중에 50%는 어린이와 부녀자들이었다고 한다. 이를 베이루트 학살 사건, 또는 사브라-샤틸라 학살 사건으로 불린다. 사브라는 베이루트내 지역 이름이고 샤틸라는 사브라에 위치한 샤틸라 난민촌을 의미한다. 그들이 나치에게 당한 분풀이를 아랍인들에게 하는 것인가..

1973년 이집트와 시리아를 주축으로 하는 아랍국의 군대가 다시 이스라엘을 침공한다. 4차 중동 전이 발발한 것이다. 유대교의 속죄일인 욤키푸르 날에 작전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욤키푸르 전쟁이라고도 불린다. 가장 적극적이었던 나라가 이집트였는데, 이집트는 다른 중동전쟁과 다르게 매우 강한 면모를 보여줬고 아랍 국가들은 석유의 무기화를 통해 이스라엘 지원국을 압박하였으며 실제로 이스라엘을 포위하였다. 이스라엘을 미국이 지원해 주고 있었는데, 고립된 이스라엘을 위해 미국에서 22억 달러를 지원했고, 5,566번이나 비행기로 물자를 날라 주기도 했다. 미국은 다시 중재자 역할을 하면서 카터 대통령이 이집트와 이스라엘 대표를 불러 전쟁을 끝낼 것을 양국에 요청한다. 이집트는 이스라엘에서 철군하고 이스라엘은 시나이반도를 이집트에 반환하는 조건을 내걸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서는 추후에 해결하자는 애매한 결론을 내고 전쟁을 종료하였다. 이집트는 최선의 결과를 얻어 냈지만 다른 아랍국들의 반발을 샀고 아랍 과격파들은 결국 2년 뒤인 1975년에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엘 사다트를 암살하기에 이르렀다.

이 지역의 갈등은 전쟁이 당장 일어난다 하더라도 이상할 것 없이 매우 심각한 상태였다. 1987년 팔레스타인 노동자들이 버스 타고 출근하던 길에 이스라엘군의 전차에 치여 죽게 되는 사건이 있었고,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 소녀가 유대인 소년의 총에 사망하는 사건에 이스라엘 법원은 무죄를 선고하는 사건들로 인해 팔레스타인인들은 저항과 봉기를 의미하는 '인티파다 운동'을 벌이게 된다. 이때의 운동은 평화적으로 진행이 되었고 주로 세금 안내기 운동, 이스라엘 물품 안 사기 운동 등이 있었다. 이때 1987년 팔레스타인에 과격 무장 단체가 출현하는데, 그 이름이 바로 '하마스'다.

이렇게 팔레스타인 지역에 갈등이 깊어지자 1993년 미국의 중재 아래 오슬로 평화협정이 이뤄지게 된다. 미국의 클린튼 대통령은 PLO의 아라파트 의장과 이스라엘의 라빈 총리를 본인의 별장으로 불러 협정을 체결하였다. 가자 지구와 서안지구를 팔레스타인에게 돌려준다는 조건이었다. 이들은 2년 뒤에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되는 등, 문제가 평화적으로 해결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팔레스타인도 이스라엘도 과격파들을 중심으로 오슬로 협정에 찬성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에서는 오슬로 협정을 주도했던 라빈 총리가 암살당하고, 팔레스타인의 하마스는 PLO의 노선에 반대하여 PLO를 탈퇴하게 된다.

2000년에 다시 2차 인티파다 운동이 발발하게 되는데 2008년까지 전개된다. 1차 때와는 달리 적극적인 테러, 납치, 자살폭탄 등을 감행하며 과격했다. 발단은 2000년에 샤론 총리가 무장 경호원을 동반한 채로 예루살렘에 위치한 이슬람 3대 성지인 알 아크사 모스크를 방문한 것이 아랍인들을 자극하게 된다. 그리고 2000년 10월에 가자 지구의 한 부자가 중고차 시장에 갔는데, 팔레스타인 시위대와 이스라엘 진압군을 만나게 된다. 이때 진압군에 의해 아들이 죽게 되는데, 이 장면이 프랑스 방송에 의해 전 세계로 방영이 되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2차 인티파다 운동이 발발하게 된 것이다. 그런 와중에 2006년 팔레스타인 지역에 총선거가 진행되고 가자 지구에서는 하마스가 정권을 잡고, 서안지구는 PLO의 후신인 파타당이 집권을 하게 된다. 이에 따라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를 2007년 봉쇄를 단행해. 봉쇄를 뚫고 물자를 조달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집트 쪽에 땅굴을 파서 물자를 공급받았는데, 땅굴의 숫자가 2천여 개나 된다고 한다.

3. 이어지는 대결 구도

이런 갈등 관계는 해결되지 않은 채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23년 10월에 가자 지구의 하마스는 이스라엘 전역에 3천 발의 미사일 공격을 감행하여 이스라엘과 전면전을 펼치려고 하고 있다. 이스라엘도 지상군을 투입하여 가자 지구를 뒤집어 놓고 있고 이란과 레바논의 무장단체 헤즈볼라의 개입이 5차 중동전으로 확대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전 세계의 귀추가 집중되고 있다. 참고로 이란은 핵무기를 가지고 있지는 않으나 상당히 높은 핵기술을 보유하고 있고 미국과 척을 지면서 상당히 군사력에 힘을 기울여 상당히 힘이 세진 상태이고 헤즈볼라는 세계 최고의 비정규군이라는 별칭으로 매우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어 이들이 하마스 편을 들어 이스라엘에 군사적으로 대항할 경우 서방 국가들과 주변의 아랍국들이 참전하는 5차 중동전쟁으로 확대될 수 있을 것이다.

Daddy's Point of View ========================

한편으로 이번 하마스의 공격은 여러 가지 다른 시각들이 있다. 2006년 가자 지구를 장악한 하마스가 이스라엘의 봉쇄로 인해 50%의 실업률, 물가 폭등 등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을 돌려보려 하는 이유가 있고, 다른 하나는 최근 미국의 적극적인 중재로 사우디와 이스라엘의 수교 움직임에 따라 팔레스타인 지역에 중동의 맹주 사우디를 편으로 잃을 수 있어 이스라엘과 사우디의 수교를 막기 위한 작전이라고 하기도 하다. 어쨌든 이 지역은 1차 세계대전 때 영국의 양아치 짓으로 인해 100년간의 분쟁이 발생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중세 시대 서유럽의 십자군 전쟁의 현대판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때는 신성로마제국이 필두에 섰었으나 지금은 미국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애꿎은 민간인의 학살에 마음이 아플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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