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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역사 이야기

르네상스의 태동, 메디치, 르네상스의 종말

by 브라보 오스카 2024. 2. 16.

1. 르네상스의 태동

중세시대가 종말을 고하는 14세기 이탈리아의 피렌체를 중심으로 전 유럽으로 확대되어 일어난 예술, 문학, 사상, 건축, 종교에 대한 헬레니즘으로의 회기, 즉 인본주의의 부활이 이루어졌던 시기를 말하며 과학과 이성이 발전하기 시작하는 15세기중반까지 이어졌다.

르네상스라는 말은 프랑스의 역사학자 쥘 미슐레(Jules Michelet)가 1855년 출간한 프랑스사에서 처음 사용되었고 이후 이 시기를 알리는 공통적인 학문 용어로 사용하게 되었다. 르네상스의 어원은 원래 이탈리아 말의 부활, 재생을 뜻하는 Il Rinascimento(Rinasimento)에서 왔다. 신이 모든 것을 지배했던 중세의 암흑기를 벗어나 그리스 문화, 즉 헬레니즘의 기반인 인간 중심으로 회귀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유럽 문명의 기원은 그리스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그리스는 자기들을 헬라스라 부르고 그들의 문화, 문명, 사상을 헬레니즘이라 불렀다. 그리스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철학가와 그들의 사상들이 있고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궁중 사사를 받으면서 동방 세계를 점령한 알렉산드로스 왕이 있다. 당시 헬레니즘 문화와 사상의 중심은 사람이었다. 그리스의 예술작품을 보면 완벽하고 아름다운 인간의 육체를 과장하지 않고 실제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밀로의 비너스, 라오콘 군상, 벨베데레의 아폴론 등이 대표적이다.

* 생각해볼 문제 : 그리스 문화가 인간 중심이라면서 실제 예술작품들은 다 신들 아닌가?

헬레니즘은 알렉산드로스 왕이 동방원정 중 모기에 물려 33살의 나이로 죽음으로써 막을 내리고 로마가 부흥을 하기 시작한다. 로마는 처음에 그리스의 문화에 대한 동경으로 그리스를 따라했다. 식자들은 말과 글을 그리스어로 쓰고 읽었다. 지금의 영어와 같은 지위였던 것 같다. 그래서 그리스에서 숭상하던 그리스 다신교를 믿었고 유일신을 주창하는 기독교가 탄생하자 엄청난 박해를 해댔다. 하지만 기독교가 너무 많이 퍼져나가자 313년 콘스탄티누스대제의 밀라노칙령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로마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는 교황이 지배하는 제국이 되면서 중세시대로 접어든다.

중세시대의 예술을 비롯한 모든 문화는 기독교로 통했다. 미술작품은 문맹인들이 성경의 이해를 위해 그려졌으며 본질에 충실하였다. 원근법도 사실성도 시대상도 입체감도 전부 무시하면서 어떻게 하면 쉽게 내용을 전달할 수 있을까가 관건이었다.

영원할 것 같던 로마도 결국 동서로마로 갈리게 되고 서로마는 게르만족에게 망하고(476년), 동로마는 오스만에게 망하게 된다(1453년). 비잔티움 제국으로도 불렸던 동로마제국은 그리스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아 문자뿐만 아니라 언어도 라틴어가 아닌 그리스어를 사용하였다. 동로마가 멸망하면서 문화적으로 활발했던 비잔티움 제국 출신의 학자, 예술가 기술자들이 이슬람교를 기반으로하는 오스만제국의 박해를 피해 이탈리아 반도로 도망쳤다.

로마의 멸망으로 이탈리아반도는 황폐해 졌지만 도시국가의 형태로 수많은 자치도시들이 탄생하게된다. 특히 중세시대 십자군 원정이 실패로 끝나고 원정로가 교역로로 변화하면서 이탈리아의 도시들이 유럽 교역의 중심이 되어 동방의 문물들이 이탈리아의 도시들을 통해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그러면서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번영을 구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예술가들은 이탈리아에 고대로마의 유적이 많아 그 시대의 예술을 공부하는 것이 손쉬웠다. 또한 동시대에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단테 등 예술 문화계의 역대급 천재들이 이탈리아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탈리아에는 엄청난 자본과 천재적 예술가들이 넘쳐나면서 자연스럽게 예술이 꽃피워질 수 있는 배경이 될 수 있었다.

그들은 중세시대의 본질에 충실하는 예술 트렌드에 벗어나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은 사실적 표현에 중점을 두었다. 왜냐하면 중세시대에 종교에 지친 사람들이 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감을 갖게 되었고 헬레니즘 문화가 지배하던 동로마에서 건너온 예술가들이 고대 로마 시대의 예술 작품에 매료되어 그리스 문화로의 회귀가 발생하게 된다. 그들은 신중심의 예술작품이 아닌 사람중심, 즉 인본주의사상의 토대 아래 예술 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이 남긴 작품들은 중세시대와는 확연히 다른, 오히려 그리스 시대의 예술품을 보는 듯이 종교를 서술하는 형식이 아닌 인간이 예술의 중심에 있게 된다. 몇몇 작품들은 아예 대놓고 그리스를 얘기하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기독교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형식은 달라지고 종류와 방법이 다양해 졌지만 기독교의 사상을 전파하기 위한 본질을 추구하는 바는 여전했다.

2. 메디치

르네상스시대에 이 가문을 얘기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다. 바로 이탈리아반도의 도시국가 중에서도 피렌체에서 메디치라는 부자 가문이다. 메디치 가문은 열성적으로 예술가들을 후원하였다. 그들이 있기에 동시대의 예술가들인 레오나르도, 미켈란젤로 등에게 돈을 주고 엄청난 명작을 펼치게 되면서 르네상스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메디치 가문은 상업과 은행업으로 큰 돈을 벌었다. 원래는 피렌체 북쪽의 무겔로라는 지역에서 가문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집안은 대대로 약사였기 때문에 이름이 메디코였다가 가문이 번성하면서 메디치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들은 모직물 교역으로 큰 돈을 벌고 피렌체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이 되었다. 부를 축적하다보니 당시 사회를 지배한 정치와 종교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 많은 군주와 교황을 배출하였다. 물론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 뿐만 아니라 밀라노의 비스콘티 가문과 스포르차 가문, 페라라의 에스테 가문, 만토바의 곤치가 가문 등이 르네상스를 이끌었으나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을 능가할 수 없었다.

그러면 르네상스 시대의 각 분야의 예술 작품들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서두에도 언급했지만 르네상스의 기본 사상은 인본주의이고 이는 그리스 헬레니즘으로의 회귀였다. 그래서 인간의 모습과 일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형태가 많았다.

대표적인 분야가 건축이다. 사실 건축의 발달은 이렇다. 동방과의 교역으로 돈을 벌게 되면서 그들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집과 지역을 멋지게 꾸미고 싶어했다. 잘 나가던 집안의 사람들은 돈을 벌어 그들의 집과 부속물에 투자를 하고 싶어 했다. 예쁘고 멋있고 웅장하게 만들고 싶어 했다. 그래서 이떄에 만들어진 대표적 건축물이 피렌체 대성당, 흔히 우리가 부르는 피렌체 두오모 성당이다. 피렌체 두오모가 유명한 이유는 내부의 돔 형식을 과학적으로 말아 올리면서 크고 웅장한 모습을 구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이 성당은 로마의 판테온을 본떠 돔형식의 지붕을 만들고 싶어했다. 그러나 당시 기술로 이를 성공할 수 있는 건축가가 없어 1296년에 착공이 되었지만 진척이 없다가 1419년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 1377년~1446년)가 등장하면서 피렌체 두오모가 완성될 수 있었다(1436년). 브루넬레스키는 자기 집과 땅까지 팔아 사비를 들여 로마의 건축물들을 연구하였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건축법과 수학에 대해 지식이 탁월해 졌다. 피렌체에서는 두오모 성당의 돔형식을 만드는데 어려움을 겪자 무명이었던 브루넬레스키가 쟁쟁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넘기지않고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던 중 대리석위에 달걀 세우기 내기를 했다. 아무도 그 수수께끼를 해결하지 못했으나 그는 달걀의 끝부분을 살짝 부숴 그 틈으로 달걀을 세웠다. 그랬더니 다른 경쟁자들이 그런거면 나도 하겠다라고 하자 그는 이게 바로 두오모를 만드는 방법이라고 하면서 내가 샘플과 디자인을 공개하면 당신들이 내 아이디어로 피렌체 두오모를 완성할 것 아니냐라고 했다고 한다. 무명의 건축가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공개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에게 일을 맡기고 자신의 보수를 최대한 받아낼 수 있는 기막힌 재치가 아니었나 싶다.

르네상스 예술품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회화와 조각이다. 이 분야에 두각을 나타낸 사람은 앞서 언급한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이다. 그들은 작품에 원근법과 해부학을 적용하여 적극적인 사실 표현과 자연 법칙에 몰두하였다. 그래서 중세와는 달리 직관적이기 보다는 과학적이었으며, 종합적이기 보다는 분석적이었고, 신의 질서를 상징하는 것보다 자연을 위하고 세계의 사실 연구에 보다 적극적이었다. 또다시 나체상이 주제로 채용된 것이 그 표현이었다.

3. 르네상스의 종말

이같이 풍성하고 아름다운 작품들을 쏟아내던 르네상스 시대도 종말을 고하게 된다. 사실 당시에 르네상스라는 말도 없었고 그들이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지만 유럽의 상황은 크게 바뀌게 되면서 르네상스의 사조는 사라지게 된다. 첫번째 이유로 과학과 기술의 발전과 이성에 대한 관심 부각이다. 이로 인해 예술 작품의 기본 테마였던 종교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모든 학문과 예술은 실학적 측면이 강조되어 실생활에서 필요한 것들을 창조하기 위한 도구로 변하게 되었다. 따라서 더 이상 아름다운 것에 심취하기 보다는 현실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추구가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두번째 이유는 대항해 시대가 도래하면서 유럽의 중심이 이탈리아에서 서안지역의 스페인과 포르투갈, 그리고 네널란드의 안트베르펜으로 옮겨졌다. 그러면서 이탈리아 지역은 소외되었고 부와 기득권이 이쪽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세번째 이유는 마틴 루터가 주도한 종교의 개혁이 있었기 때문이다(1517년). 마틴 루터의 기존 기독교에 대한 반발은 기존 기성 종교인에 대한 반항이었다. 특히 면죄부를 판매하며 세속화되어가고 상업적으로 변질되면서 마틴 루터는 신은 존재하는가 라는 의문을 갖게 되고 결국 기존 종교를 거부하여 카톨릭과 개신교로 나눠지고 르네상스의 화려한 예술에 대한 후원자들이 지위를 잃어 더 이상 예술에 대한 지원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네번쨰는 정치적인 이유이다. 르네상스의 발상지라 할 수 있는 이탈리아에서는 군소 도시국가로 난립하면서 이들간의 치열한 이탈리아 전쟁이 발생한다(1494-1559). 그러면서 이탈리아는 황폐해지고 중심지역에서 멀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예술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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