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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역사 이야기

정조시대의 세계 정국, 정조 역사앞으로, 수원 화성

by 브라보 오스카 2024. 2. 26.

▶ 정조대왕(1752-1800, 제위 1776-1800).

정조는 조선의 22대 국왕이야. 조선 후기에 비극적인 가족사를 극복하고 조선 후기의 르네상스를 열 뻔(?) 했던, 아주 총명한 왕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열 뻔 했다는 것이다. 결국 르네상스를 열지는 못했어, 안타깝게도. 정조가 어떻게 조선 후기 르네상스를 열 뻔 했는지를 알아보도록 하자.

항상 아빠가 이야기하는 거지만 역사는 종적으로도 중요하지만 횡적으로도 중요하다. 정조시대에 다른 세계는 어떻게 되고 있는지를 간략하게 짚고 넘어가 보자.

1. 정조시대의 세계 정국

정조가 영조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시기는 1776년이고 25년간 재위하다 1800년 사망한다. 이때 유럽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을까? 정조가 태어나고 4년 뒤인 1756년에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간에 슐레지엔의 영토를 놓고 전쟁을 벌였는데, 이 전쟁에 영국이 프로이센과 동맹을, 프랑스, 스웨덴, 러시아 등이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고 유럽에서뿐만 아니라 저 멀리 아메리카와 인도에서도 전투가 터진 이른바 7년 전쟁이 벌어졌다. 이는 세계대전에 맞먹는 대규모 전쟁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의 독립과도 연결이 되어 있는 전쟁이었다. 이 전쟁 이후 아메리카의 식민지 연합은 영국의 과도한 과세정책에 항의하다 1773년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을 계기로 독립전쟁으로까지 번지게 된다. 전쟁 중 13개 지역의 식민지 연합은 1775년 독립을 선포하게 되지. 결국 미국은 전쟁의 승리로 1783년 파리조약을 통해 독립국으로 인정을 받는다.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독립국으로 인정받은 미합중국이 Go West!를 외치며 아메리카 원주민을 잔인하게 학살하며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가운데 1789년 프랑스에서는 대혁명이 일어난다. 혁명은 무자비해서 왕인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1793년 파리 콩코르드 광장의 단두대에서 죽임을 당하고 만다. 이후에 정치적 혼란을 보이다 1799년 나폴레옹이 통령정부를 세우며 주변 국가들과 마찰을 일으키면서 소위 나폴레옹 전쟁이라는 시대적 혼란에 다시 흡수되게 된다.

한편 조선의 옆 나라 중국에서는 청나라 6대 황제인 건륭제, 7대 황제인 가경제가 통치하면서 선대의 강희제와 건륭제가 다져 놓은 황권 하의 풍요로운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으로 세계 1등 국가라는 자부심이 넘쳐나고 있었지만 서방의 여러 열강들이 중국과 교역을 하기 위해, 정확히 이야기하면 중국을 뜯어 먹기 위해 들이밀고 들어와 서서히 몰락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게다가 안으로는 황실의 부패가 극에 달해 매관매직, 사치향락이 끊이질 않아 백성들은 무거운 세금으로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1796년 백련교도의 난이 발발하면서 민중의 항쟁이 계속 이어지게 된다.

여하튼 정조가 왕위를 이어가던 18세기 후반은 전 세계가 격동에 휘말리고 있었다. 조선 또한 만만치 않게 혼란한 정국을 보내며 팽팽한 긴장감이 이어지고 있었다.

2. 정조, 역사 앞으로

조선의 전성기를 말할 때 보통 세종 시대와 영정조 시대를 많이 이야기한다. 정조의 선대 임금이자 할아버지였던 영조 시대에는 정치적 안정과 성공적 경제 정책으로 백성들은 나름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영조는 51년 7개월이라는 역대급 최장기 왕위에 있었고 그 당시에는 매우 드물게 여든 살이 넘도록 장수를 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후궁의 자식이라는 콤플렉스 때문에 강력한 왕권을 수립하지 못했다. 그리고 당파 싸움이 극에 달해 정권을 잡기 위해 죽고 죽이는 처참한 정변이 끊이질 않았다. 노론과 소론의 대립은 영조의 아들이자 세자였던 사도세자가 1762년 뒤주에 갇혀 죽는 임오화변으로까지 비화하게 된다. 영조는 이러한 당쟁의 폐단을 없애려 골고루 인재를 등용하고자 하는 탕평책을 펴게 돼. 이 탕평책은 정조 때까지 이어진다. 영조는 일본으로부터 고구마를 들여와 백성들의 기근을 해결해 줘. 그리고 신문고 제도를 부활하여 백성들의 고민을 듣고자 애를 많이 썼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나서 매우 슬퍼했다고 한다. 사도세자는 어려서 매우 총명하고 아버지 영조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지만 영조의 과도한 세자 수업과 엄격한 궁중 규율을 이겨내기 힘들어 정신병 상태까지 오게 된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사도세자의 아내였던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을 보면 사도세자의 기행이 정말 혀를 찰 정도였다고 한다. 어쨌든 아들 사도세자를 잃은 아버지 영조는 그 사랑을 손자인 정조에게 쏟게 된다. 하지만 그 쏟아지는 사랑을 두려워하는 이들이 있었으니 임오화면으로 정권을 잡게 된 노론은 앞으로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영조를 이어 왕위를 물려받게 될 경우 엄청난 피바람이 불 것이라는 생각으로 정조의 제위를 알게 모르게 막아내려 했다.

하지만 정조는 1776년 3월 10일 조선의 22대 왕으로 등극하게 돼. 즉위식을 치렀겠지? 아마도 사방에서 정조의 아버지에 대한 복수에 벌벌 떨었던 인물들이 많이 있었을 거야. 게다가 연설문 중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고 해.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어마 무시한 말이다. 사도세자를 죽게 만든 인물들은 다들 죽여버리겠다라고 으름장을 놓는 거나 다름없이 들렸을 것이다. 예전 연산군이 자신의 어머니 윤 씨의 피 묻은 적삼을 보고 미쳐 날뛰면서 산 사람뿐만 아니라 죽은 사람까지 다시 죽이는 부관참시를 행하는 공포 상황이 눈앞에 펼쳐졌을 것이다.

하지만 정조는 달랐다. 선친왕이었던 영조의 뜻을 따르되 사도세자의 추승을 금지하겠다라고 하며 사도세자의 예를 대부로 하고 태묘로 하지 않겠다 하며 왕으로서 인정을 하지 않고 넘어가겠다는 이야기다. 더군다나 혜경궁은 대비와 등등하게 할 수 없다 하며 정확히 선을 그었다.

주변의 노론파들은 한숨을 돌릴 수 있었겠지. 하지만 그들은 그들이 살아남는 길은 정조가 죽는 길밖에 없다 생각하면서 정조가 왕으로 즉위한 이후부터 지속적인 암살 시도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책 읽는 척 밤에 잠을 안 자고 자더라도 의복을 정제하고 잠이 든 때가 많았다고 한다. 정조의 암살 계획은 실록에 나와있는 것만 7번이라고 하니 얼마나 집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정조가 승하할 때 불분명한 사인으로 대부분 독살을 의심하였다.

정조는 주변의 목숨이 위태로운 위험한 상황에서도 정치를 제대로 했던 것 같다. 일명 문(文)과 무(武), 즉 브레인 양성과 무력의 성장을 동시에 꾀한 인물이었어. 문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규장각을 설치한 것이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다. 규장각은 도서관이자 박물관이자 학교라 할 수 있다. 이곳에서 정조는 문화정치를 수행하고 인재를 양성하여 재체공, 정약용, 정약전,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서이수와 같은 훌륭한 학자들을 키워냈어 이들 대부분은 북학파로 성장해서 외국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국력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을 한다. 지금 서울대의 중앙 도서관을 규장각이라 칭하는데 이를 계승한 것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그리고 무의 측면에서 보면 장용영을 설치하였다는 것이 매우 의미 있다. 장용영은 왕의 친위대야. 원래는 30명 안팎이었는데 1만 8000명까지 증원해서 어느 군대보다 강한 군인들을 키워서 본인의 주변에 배치시켰다. 자체적 무술 훈련을 책으로 펴낼 만큼 체계적으로 군대를 양성하였다. 죽음의 그림자를 피하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볼 수 있다.

3. 수원화성

그리고 가장 독보적인 업적은 수원으로의 천도를 추진했다는 것이다. 경희궁에서 수원 화성으로 이전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정약용, 채제공 등을 발탁하여 이 프로젝트에 투입시켰다. 원래는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좋은 곳에 옮기고 싶어서 고르고 고른 지역이 수원이 된 것이다. 그래서 거기에 묘를 만들고 며칠 머물 수 있는 장소를 만들려 하다 보니 확대돼서 아예 성을 가진 도시를 만들게 된 것이다.

1794년 시작된 수원 화성 축조 프로젝트에 첨단 과학 기술과 장비가 동원된다. 대표적인 것이 기중기다. 정약용이 성 축조에 필요한 돌을 팔달산에서 운반하기 위해 기중기를 발명하여 바로 실전 투입시켰다. 채제공은 10년짜리 계획을 단 2년 7개월 만인 1796년에 완성시켰다. 그러면서 1804년 혜경궁 홍씨의 칠순 때 천도 계획을 선포하고 후계자인 순조 때 천도를 완성할 계획을 그리게 된다.

사실 정조는 수원으로 수도를 옮겨서 한양에 득실거리는 외척과 노론 세력들을 멀리하고 싶었던 것이다. 본인이 꿈꾸는 세상, 백성이 풍요롭게 잘 살수 있는 경제적 도시, 정치적 균형을 이루며 안정적 통치가 가능한 왕권, 이런 것들을 한양에서는 도저히 할 수가 없었고 새로운 곳으로 이전해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주변의 귀족세력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정조는 몸의 종기가 퍼져 1800년 음력 6월 28일 결국 승하하고 만다. 하지만 이 죽음에는 숱한 이야기가 숨어있다. 의문시되는 죽음을 놓고 독살을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이는 증명된 것은 아니다. 다만 정조의 정확한 사인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도 사실이다. 정조가 승하한 뒤 어의였던 강명길이 죽임을 당해 그 이유도 석연치 않다.

정조는 47세의 일기로 세상을 등지고 만다. 정조가 10년만 더 살았으면 한국의 근대사가 치욕과 환란으로 점철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왜냐하면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외국의 신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으로 국가적 역량을 키우고 경제를 부흥시켰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정조 이후의 왕들은 순-헌-철 삼대로 이어지는 어린 왕 들인데, 이들은 스스로가 왕이라기보다는 엄마의 치마폭에 휩싸여 외척이 정권을 잡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기보다는 자신들의 배를 불리기 위한 수단으로 정권을 이용해 결국 조선의 국운을 일본에게 팔아 치우게 된다.

정조는 본인 스스로를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 불렀다. 냇물은 만 개여도 거기에 비치는 달은 하나인 것처럼 임금은 만백성의 주인이라는 뜻이다. 이는 정조의 인재관과 민생관을 볼 수 있다. 정조가 남긴 말을 끝으로 이번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자 한다.

만천명월주인옹은 말한다. 내가 많은 사람을 겪어 보았는데, 아침에 들어왔다가 저녁에 나가는 것이 오는 것인지 가는 것인지 모르는 자도 있고, 하는 일이 얼굴빛과 다르고 눈이 마음과 틀린 자가 있는가 하면, 트인 자, 막힌 자, 강한 자, 유한 자, 어리석은 자, 소견이 좁고 얕은 자, 용감한 자, 겁이 많은 자, 현명한 자, 교활한 자, 뜻만 높고 실행이 따르지 않는 자, 생각은 부족하나 고집스럽게 자기주장만 하는 자, 모난 자, 원만한 자, 활달한 자, 대범하고 무게가 있는 자, 말을 아끼는 자, 말재주를 부리는 자, 엄하고 드센 자, 멀리 밖으로만 빙빙 도는 자, 명예를 좋아하는 자, 실속에만 주력하는 자 등등 그 유형을 나누자면 냇물처럼 천 가지 만 가지일 것이다. 이에 대들보 감은 대들보로, 기둥감은 기둥으로 쓰고, 오리는 오리대로 학은 학대로 살게 하여 그 천태만상을 나는 그에 맞추어 필요한 데 쓴 것이다. 그의 단점은 버리고 장점을 취하고, 선한 점은 드러내주고 나쁜 점은 숨겨주며, 잘한 것은 안착시키고, 잘못한 것은 뒤로 돌려주고, 규모가 큰 자는 진출시키고 협소한 자는 포용하면서 재주보다 뜻을 더 중히 여겨야 하느니라.

Daddy's Point of View =================

우리는 다 같이 수원 화성을 다녀온 적이 있다. 보존이 비교적 잘 되어서 즐기기에 참 좋았다. 하지만 서울에 가까이 있고 수원이라는 큰 도시 한복판에 있다 보니 많이 상업화되어서 화성의 원 의미를 그려내기 아쉬운 점도 많이 있었다. 정조의 정신이 많은 사람에게 전파될 수 있도록 수원 화성이 잘 보존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너희들은 정조가 가지고 있는 애민(愛民)정신, 즉 백성을 사랑하고 인간을 존중하며 사람을 위한 정책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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