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이방원 하면 무엇이 먼저 떠오르는가? 선죽교에서의 정몽주 살해, 하여가, 철권통치, 왕자의 난 등등 충신 킬러, 폭력적인 이미지가 강하다. 사실 태종은 일반인의 평가에 있어 그렇게 호의적이지 못하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그는 아버지 태조 이성계의 조선 창업을 완성시킨 인물이다. 혼자한 것이 아니므로 많은 이해 당사자가 있었고 구심점으로 모이기보다는 원심력으로 권력이 흩어져 서로 싸우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방원은 강력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리더십의 체계를 세워 그의 아들 세종에게 조선의 최 전성기를 누릴 수 있도록 선물한 장본인이다.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그의 리더십을 중심으로 알아보도록 하자.
1. 역성혁명
이방원은 1367년 고려말 개성에서 아버지 이성계와 신의왕후 사이에서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나 역성혁명에 기여하였으며 조선의 세 번째 왕으로 즉위한 후에 왕권강화 정책으로 조선왕조의 기틀을 확립한 인물이다. 창업과 수성을 동시에 이룬 바탕에는 그의 강력한 리더십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문과 무 모두 특출난 재능을 보여 과거시험 문과에 합격할 정도였다. 특히 1382년 진사시를 거쳐 이듬해 분과의 병과에 급제했을 때 아버지 태조 이성계도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이성계는 1388년 우왕과 최영의 명령에 따라 명을 공격하러 요동 정벌을 나서던 중 위화도에서 사불가론을 내세워 회군을 실행해 위왕, 최영 등 구 권력 세력을 제고하고 역성혁명을 이룩해 결국 1392년 조선의 창업을 완성하는데 큰 기여를 하게 된다.
2. 왕자의 난
하지만 이방원은 이성계의 심복이었던 정몽주를 독자적으로 제거하든 등 아버지의 눈밖에 나게 된다. 이에 모든 국정을 정도전이 총 지휘하게 되며 이방원은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진다. 그러면서 이방원은 주변을 맴돌면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때 방원에게 중요한 계기로 다가온 것이 이성계가 후계자를 예상을 깨고 장자인 방우가 아닌 막내 방석에게 세자의 자리를 주게 된다. 방석은 막내인데다 이방원의 어머니 신의왕후의 소생이 아니라 태조의 계비였던 신덕왕후의 아들이었기에 적자 왕자들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하지만 방석에게는 정도전이라는 최고 권력인의 후견이 뒤를 바치고 있었다. 방원은 이에 1398년 방석이 정도전과 술을 먹으러 간 곳을 급습해 정도전과 방석을 모두 죽여버린다. 이를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칭한다. 또 2년 뒤에는 방원의 바로 위에 있는 형 방간이 박포라는 인물의 꼬임을 받아 권력을 잡으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이것이 제2차 왕자의 난이었는데 방원은 이를 모두 진압하여 완전히 권력을 잡게 된다.
방원은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왕으로 올라가지는 않는다. 적자는 큰 형이었던 방우였는데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 죽어버려 그 바로 아래인 방과가 실질적인 적장자로서의 역할을 하며 왕으로 추대한다. 그가 바로 조선의 2대왕인 정종이다. 아버지의 잘못된 세자 책봉을 바로 잡는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이후 1400년 10월 정종에게 선위를 받는 형식으로 조선의 제3대 국왕 즉위한다.
왕위에 오르자마자 태종은 중앙집권 정치 체제를 시행해야 한다라는 판단하에 왕권 강화 정책을 펼치게 된다. 정종 때 개경으로 수도가 옮겨진 것을 다시 한양으로 원복시키고 경복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보완 차원에서 창덕궁을 건립하게 된다. 그러면서 제도적으로는 삼정승 합의 체제인 의정부 서사제를 폐지하고 육조직계제를 실시한다. 즉 합의는 필요 없고 왕의 명령을 육조가 배분하여 실행하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백성을 다스리는 원천인 인구센서스와 비슷한 호패법을 제정해 신분과 인구수를 파악하였다.
3. 민생
아울러 태종은 정치적으로는 왕권 강화 정책을 폈지만 민생을 위한 사업도 추진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청계천 공사이다. 청계천은 배산임수를 이루는 서울의 풍수지리를 이루는 핵심 요소이나 비만 오면 범람하여 물바다가 되어 버린다. 그래서 서울의 물을 청계천으로 모이게 만드는 작업을 하게 되는데, 하천의 바닥을 파서 물의 양을 넉넉히 유지할 수 있게 함과 동시에 둑을 쌓아 범람하지 못하게 했다. 재밌는 것은 청계천이 서에서 동으로 흐른다는 것이다. 서울의 개천은 모두 동에서 서로 흐른다. 한반도의 지형이 동고서저 형태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울의 중심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형태로 서울의 중심 하천인 청계천만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것이다. 태종은 청계천 공사를 하는 과정에서도 최대한 백성을 배려하는 정책을 쓰게 되는데, 새벽 4시 이후에 공사 시작, 밤 10시 전에 무조건 공사 중지를 명하였다. 무리한 공사를 피해 안전을 무엇보다 우선시하는 정책을 썼던 것이다. 또한 공사 중 인부들의 인명 피해를 관리하기 위해 의료시설을 적극 활용하였는데, 전의감, 혜민서, 제생원 등을 두어 사고 시 치료를 신속하게 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였다. 이 청계천 공사는 1412년 2월에 시작하여 1개월 만에 완공한다.
그리고 태종은 중앙집권을 강화하며 정치적 안정을 진행하며 후계자를 아주 잘 지명했던 대표적인 왕으로 인정받는다. 원래는 적장자인 양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다가 이후 총명한 충녕대군을 세자로 다시 책봉하니 그가 조선의 4대 임금 세종이다. 이때 적장자가 아닌 다른 아들이 세자로 되는 명분으로 택현을 내세웠다. 택현이란 장자 상속이 원칙이나 필요한 경우 어질고 현명한 사람을 택한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세자 책봉 이후 2개월만에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2선 후퇴를 한다.
Daddy's Point of View ================
태종은 분명 힘이 있었던 인물이었던 것 같다. 후대의 평가는 그 힘만을 보며 권위주의에 억압받아 그 힘에 대한 반발로 독재자, 권력가로 폄하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태종은 혼란스러운 건국 초기에 강력한 추진 엔진이 필요하다라고 판단하여 매우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를 건 것이다. 어찌보면 박정희, 전두환 이런 강력한 통치 리더가 있었기에 우리나라가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니었을까, 새삼 생각하게 한다. 아울러 너희들은 너희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조건 밀어붙이라고 말하고 싶다. 판단은 후대가 하니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 강력한 리더는 언제나 필요한 법이다. 시대가 어떤 시대이던 리더는 항상 강해야 하는 법이다. 힘을 키우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해박한 지식, 설득력과 포용력이 있어야 한다. 책을 많이 읽으면 이 모든 것들의 반 이상은 해결한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을 반드시 읽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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