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봄#전두환#쿠데타#혁명 #김재규#박정희#최규하
요즘 '서울의 봄(감독 김성수, 출연 정우성 황정민 등, 2023)'이라는 영화가 이슈다. 아빠가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90년대였기 때문에 80년대의 억압적인 분위기까지는 아니었으나 여전히 군부 정권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캠퍼스가 시끄러웠다. 광주사태로만 알고 있었던 것이 민주 항쟁이었고 5.16혁명이 아니라 쿠데타였다는 것을 대학에 가서 새삼 알게 되었다.
그중에서 가장 쇼킹했던 것 중 하나는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을 밟고 일어난 제5공화국의 출범, 더 구체적으로는 12.12 군사 쿠데타에 대한 내용을 자세히 알게 되었을 때이다. 그래서 관심이 없을 것 같은 너희들에게 시대의 아픔을 전해주고자 한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아직 아빠는 '서울의 봄' 영화를 보지 못했다. 예고편을 보면 서울의 봄이 아니라 12.12 군사 쿠데타가 주된 것 같은데 서울의 봄과 쿠데타가 8년의 시간을 어떻게 연결할지 궁금하다. 서울의 봄은 간단히 얘기하면 1987년 전두환 정권의 권력 연장에 맞서 민중이 봉기하여 결국 호헌을 철폐하고 대통령 직선제를 이뤄 민주주의가 빛을 본 시점을 말한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을 본 떠 만든 말이다.
지금부터 12.12 군사 쿠데타에 대해서 이야기를 펼쳐 보도록 하겠다.
1. 516 군사 쿠데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1995년 전두환, 노태우의 내란 및 내란 목적 살인 혐의에 대해 불기소 처분을 내리며 장윤석 검사가 밝힌 입장
쿠데타 (coup d'tat)
무력에 의해 정권(政權)을 빼앗는 일. 지배 계급 내부의 권력 이동으로, 체제 변혁을 목적으로 하는 혁명과는 구별됨.
때는 거슬러 박정희 대통령 때로 올라간다.
박정희는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후 1972년 유신헌법을 제정하여 영구집권 체제에 들어갔다. 하지만 내부 권력 분열로 인해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의 최측근이었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와 경호실장 차지철을 권총으로 저격하여 살해하였다. 이를 10.26사태라고 한다. 이로 인해 국무총리였던 최규하가 대통령 권한 대행의 자격으로 과도 내각을 수립한다. 같은 해 12월 6일 최규하가 제10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2. 1026사태
이때 10.26사태 이후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군의 정치적 중립을 취한다. 소장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10.26 사건 조사를 위해 정승화로부터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된다. 전두환은 육사 11기생들로 구성된 하나회를 통해 11월부터 정승화를 제거하고 군부를 장악할 계획을 세운다. 하나회는 육사 11기생들 중에서 영남 출신이 1951년 조직한 오성회가 1961년 칠성회로, 다시 1963년 하나회로 바뀌게 된다. 원래 군부에는 사조직을 만들 수 없어 이 모임은 불법 조직이다. 전두환의 하나회는 결국 12월 12일 일명 12.12사태라 불리는 군사 정변을 일으켰고 대통령의 재가 없이 정승화 참모총장을 체포하고 군을 장악한다.
전두환은 군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권력자로서의 역할을 하며 국정을 지휘한다. 최규하는 껍데기만 대통령이었던 것이다. 1980년대 초 전두환의 군부 정권 체제 움직임이 보이자 전국 각지에서 학생 시위가 일어난다. 시나리오에 따라 5월 17일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전국 비상계엄령을 선포한다. 국회를 무력으로 봉쇄하고 주력 정치인들을 연행, 체포 및 구금 시켰다. 정당 정치 활동 금지, 국회 폐쇄, 국보위 설치 등을 실시한다.
이에 광주에서는 신군부의 비상계엄령에 반대하여 5월 18일 학생 중심의 반대 시위가 계엄군의 투입 및 발포로 인해 시민군으로써 대항하는 극한의 혼란이 야기된다. 신군부는 광주를 통제하여 전국적 반대 시위의 확산을 막는다. 계엄군과 시민군의 전쟁이 발발하였다. 계엄군은 국군의 공수부대로 이루어졌다. 시위대뿐만 아니라 무고한 시민에게까지 발포하는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하였다. 이때 작전명이 '화려한 휴가'라는 썰도 있다. 작전에 투입된 군인은 북에서 남파된 간첩들이 선동한 내란 집단을 처단한다는 임무를 받았다고 한다. 결국 계엄군 투입 열흘 만에 전남도청에서 항거하는 시민군이 제압당하면서 시위는 종료된다.
전두환은 시민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80년 9월 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이후 10월 대통령 7년 단임제로 개헌을 하여 이듬해 2월에 다시 12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제5공화국의 시작이 되었다.
3. 629선언
전두환 정권은 전 국민의 반대 시위에 직면했다. 정권 말기인 1987년에 각계에서 요구하는 민주화 요구를 묵살하고 헌 헌법을 유지하며, 후계자에게 권력을 이양하겠다는 413 호헌 조치를 단행한다. 이에 대해 반대 시위가 잇따랐고 급기야 서울대생 박종철의 고문치사 사건, 연세대생 이한열의 최루탄 사망 사건을 계기로 전국적인 민주화 시위가 확대되었다. 1987년 6월 10일 각계 인사가 참여한 민주화 추진 국민운동 본부가 6월 항쟁에 돌입하여 결국 정권 이인자였던 노태우 당시 여당 총재에 의해 시국수습 방안이 발표되어 국민 직접 선거에 의한 5년 단임제 대통령 선출제가 시행된다.
하지만 전두환의 하나회 멤버이자 친구인 노태우가 1987년 13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국민적 열망이었던 문민정부는 5년을 다시 기다려야 했다.
10.26사태가 일어나서 전 국가적으로 혼란이 일어났던 것을 아빠는 생생히 기억한다. 당시 국민학생(초등학생을 이르는 옛말)이었지만 대통령이 죽었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슬퍼하고 실제로 울었던 주변 사람들도 보았다. 그들은 박정희를 국민의 대표가 아니라 왕 내지 통치자로 여겼던 것 같다. 12.12사태 때는 전혀 몰랐고 87년 6월 항쟁은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아빠도 길거리에서 시위하는 어른들을 따라갔던 기억도 있다. 대학생 때는 거리에서 반독재 투쟁 시위도 했었고 경찰서까지 끌려가기도 했었다.
지금은 반백의 나이에 아스란히 남은 기억이 돼버렸지만 아직 남아있는 기억만으로도 아찔하고 가슴이 아프다. 우리의 역사는 결코 파워풀하지 못하다. 특히 근현대사를 보면 외세와 독점적 권력 앞에서 국민들은 대항해 싸웠지만 힘에 굴복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런 희생 과정을 거쳐 지금 위의 이러한 내용을 공개적으로 블로깅을 할 수 있다는 것도 큰 행운이라 생각한다. 너희들은 이런 역사적 사건을 사회면 기사처럼 보지 말고 전체적인 맥락에서 왜 사람들은 거리로 뛰쳐나올 수밖에 없었는지를 스스로 알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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