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선시대
이성계는 1388년 우왕과 최영의 요동 정벌 명령에 위화도까지 갔으나 4불가론을 내세워 요동 출정을 거부하고 개성으로 회군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는다.
1392년 이성계는 고려의 마지막 왕이었던 공양왕의 왕위를 이어받아 새로운 왕조가 탄생하였다. 국호가 조선으로 바뀐 것은 그 다음 해인 1393년이다.
태조 이성계의 아들 태종 이방원은 왕자의 난을 통해 3대 왕으로 집권한다. 이때 정도전을 비롯한 개국파들을 숙청하여 절대 왕권을 확립한다.
세종은 과학, 학문, 군사, 문화 등에 큰 업적을 이룬다.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 훈민정음, 측우기, 자격루, 앙부일구 등이 세종 때 만들어졌다.
세종의 둘째 아들로 야심이 가득했던 수양대군 세조는 병약했던 그의 형 문종이 왕으로 즉위한지 2년 3개월 만에 죽고 어린 왕 단종이 12살에 즉위하자 종친의 대표로서 단종의 보호자 역할을 자처한다. 그러던 와중에 세조의 동생 안평대군이 움직임을 보이자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 황보인 등을 제거하고 안평대군을 강화도로 유배시켜 정권을 장악한다. 이후 단종을 폐위하고 스스로가 왕이 된다. 세조는 왕권 강화에 무엇보다 힘을 기울였다.
세조의 쿠데타를 도와 집권하게 된 세력이 훈구파였는데, 이들의 힘이 막강해지자 사림파를 등용하기 시작했다. 사림파는 고려 말 충신 길재가 이성계의 왕위 찬탈 후 초야에 묻혀 양성한 후진들이 성장해서 세력을 이룬 정파이다.
사림파 김종직은 훈구파 견제를 위해 썩 마음에 들지 않았음에도 세조에 의해 등용되었는데 조의제문을 지어 세조반정을 조롱했다. 조의제문은 김종직이 초나라 항우에게 피살당해 죽은 회왕을 추모하는 글인데 세조의 단종 살해를 빗대었다. 향후 학자들의 동조와 재조롱이 이어졌는데, 허균은 조의제문을 재풍자했다가 그의 작품이 불온서적으로 격하되었다. 또한 연산군 때 발생한 무오사화의 발단이 되기도 한다.
세조의 손자인 성종은 1458년 경국대전 편찬을 완료하여 조선의 통치 규범을 완성하였다. 성종 때 스멀스멀 기어 오던 사림파는 연산군 때 1498년 무오사화, 1504년 갑자사화 때 숙청을 당한다.
사림파는 대대적인 숙청을 당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계속 중앙 정계에 진출한다. 그 이유는 중중 때인 1543년 경북 영주에 주세붕이 세운 소수서원을 필두로 지방 사학인 서원이 양성되어 이곳에서 사림파 인재들이 끊임없이 과거시험을 통해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사림파는 선조 때 권력을 잡게 된다. 이때부터 사림파는 약 300년간 집권을 하게 된다. 사림파는 이후 붕당정치를 통해 1575년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정쟁을 벌이다 동인이 집권하고, 동인은 1589년 기축옥사를 계기로 남인과 북인으로 대립하였다. 이를 통해 북인이 집권하였으나 1623년 인조반정을 계기로 북인은 몰락한다. 대신 서인 계열의 노론과 소론이 1680년 경신환국으로 대립하다 소론이 집권하고 남인은 몰락하게 된다.
아직도 신에게는 열두 척의 배가 있습니다
충무공 이순신은 명량해전에 임하기 앞서 선조에게 보낸 편지에 언급된 말이다. 이순신의 많은 어록이 있다. 하지만 이 말은 깊이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포기하지 말라고 후손들에게 일침 하는 것은 아닐까?
조선은 2차례 큰 외침의 전란을 겪게 된다.
첫 번째는 왜의 침입이다. 선조 때인 1592년 임진왜란, 1597년 정유재란의 두 차례 왜의 침입 전쟁으로 민생이 피폐해진다. 총 7년간의 전쟁은 왜의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함으로써 조건 없이 철수를 하여 전쟁이 끝난다.
두 번째는 여진족/만주족의 침입이다. 선조 때의 세자 광해군은 왜란 당시 의주로 도망가는 선조를 대신해 경복궁을 지켰으며, 이후 왕이 되어서 커지는 여진족, 만주족 등의 북방 민족들에 대해 명과 같은 등거리 외교를 펼쳤다. 이는 명분을 내세운 꼴통 보수 세력에 의해 불만을 야기하게 되고 광해군을 축출하는 인조반정이 일어나게 된다. 인조와 그를 옹립한 세력은 친명에 강력히 드라이브를 걸면서 북방 민족의 심기를 건드려 결국 인조 때인 1623년 후금과의 정묘호란, 1636년 청과의 병자호란이 발발한다. 인조의 삼전도의 굴욕을 겪으며 군신의 관계를 인정하며 강화를 맺고 청군은 물러 나게 된다.
두 차례의 커다란 전란으로 백성의 경제는 거덜 났는데도 불구하고 중앙에서는 붕당정치가 판을 쳤다. 이에 17세기 영조와 정조 때에 붕당을 구분하지 않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려는 탕평책을 쓰게 된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문제 삼지 않고 계속 개혁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북학파 등용, 수원 천도 등이 대표적 업적이다. 하지만 정조의 의문사로 조선의 개혁은 중단되고 순조,철종의 3대에 걸친 암울한 세도정치가 시작된다.
1800년 정조의 죽음 이후 순조가 11살의 나이로 왕위에 즉위하자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섭정을 시작하나 순조가 15살이 되었을 때 갑자기 정순왕후가 섭정을 내려놓아 순조의 외아버지인 안동 김씨 김조순이 섭정을 하게 된다. 이때부터 안동 김씨가 철종대까지 약 60년간 권력을 잡게 된다. 세도정치 기간 동안 전정, 군정, 환정 등 이른바 삼정의 문란으로 백성들의 경제는 빈궁해졌고 매관매직이 성행하여 지방 정치도 개판이었다. 결국 순조 때인 1812년 홍경래의 난, 철종 때인 1862년 진주민란 등이 발생하게 되었다.
2. 구한말
세도정치로 민심이 극악으로 치달을 때 흥선대원군이 자신의 아들 이명복을 헌종의 어머니인 신정왕후 조 씨, 일명 조대비의 양자로 입적해 후사가 없는 철종의 뒤를 이어 1864년 26대 국왕(고종)으로 등극한다. 고종은 제위 당시 11세였기 때문에 흥선이 섭정을 한다. 흥선은 외척 세력을 배격하고 비변사 폐지, 왜란 때 불탄 경복궁 재건, 서원 철폐 등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였다.
수국 정책을 폈던 흥선의 정책은 고종이 성인이 된 1873년부터 외척이었던 여흥 민씨가 등장한다. 이때부터 개화론자들이 득세하여 일본과 1876년 강화도조약을 통해 문호 개방을 하게 된다. 일본을 필두로 제국주의 열강이 조선에서 활개를 치기 시작한다. 1884년에 일본 유학파 김옥균을 필두로 하는 급진 개화파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떠 일본의 지원으로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3일 천하로 끝난다. 1894년에 급진적인 개화정책, 청/일/러의 외세 3파전으로 민생은 다시 어려워져 녹두장군 전봉준이 전라도 지역에서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킨다. 동학군 진압을 명목으로 대립하던 청과 일본은 결국 한반도 내에서 청일전쟁이 발발한다. 그 와중에 일본은 김홍집, 박영효 등이 추진하는 갑오개혁을 지원한다. 갑오개혁은 개국기원 연호 사용, 은본위 화폐제도 실시, 도량형 통일, 문무 반상의 구별 철폐, 태양력 사용, 단발령 단행, 종두법 시행 등 파격적인 근대적 제도를 실시하였다.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을 지켜본 고종은 일본의 총칼에 두려워 러시아 공관으로 도망가는 아관파천으로 결국 갑오개혁은 실패하고 만다.
한편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의 지배력을 강화하였고 1897년 러시아 공관에서 고종을 끌고 덕수궁으로 다시 데리고 와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고종을 황제로 등극시킨다. 조선은 제국이 되고 왕은 황제가 되었으나 이는 일본이 자신들 외에 러시아나 청나라의 다른 국가들이 조선을 건들지 못하게끔 만든 조치였다.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의 영향력이 조선뿐만 아니라 요동, 대만까지 확대되면서 러시아의 견제가 들어간다. 러시아는 한창 남하정책을 추진 중이어서 발칸반도,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하였으며 극동지역에서는 조선과 직접적인 수교를 추진하여 한반도를 러시아의 영향력에 두고자 하였다. 결국 한반도에서의 이해관계가 충돌하여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한다. 전쟁은 양국 모두에게 큰 피해를 끼치면서 포츠머스 강화조약으로 전쟁이 종료되었다. 이로 인해 러시아는 일본에 대한 극동지역을 양보한다는 조건으로 합의한다. 사실상 일본의 승리였던 것이다.
거칠 것이 없어진 일본은 바로 1905년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하여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는 을사늑약을 체결한다. 고종은 을사늑약을 인정하지 않고 조인을 하지 않고 있다가 1907년 이상설, 이준 등을 헤이그에 보내 부당함을 알리려 했다. 하지만 이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일본은 이를 빌미로 고종은 강제 퇴위당한다. 이후 마지막 황제 순종은 일본에 의해 1910년 한일합방조약을 체결, 즉 경술국치를 당하고 대한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이후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에 의해 패망하는 1945년까지 조선은 일제강점기가 된다. 국권 침탈 후 일본은 조선에 대한 무단 강압 통치에 들어간다.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 추진된다. 이에 반발한 조선 민중은 1919년 3.1만세운동을 벌인다. 3.1운동 이후 현재 대한민국 정부의 시초가 되는 임시정부가 수립된다. 일제는 이후 1920년대에 문화통치로 전환한다. 언론/출판/결사/집회의 자유를 부여한다. 일본의 우월함과 조선의 열등함을 친일 세뇌된 조선인에 진행하며 민족성을 말살하는 과정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전 세계 경제 대공황에 일본도 직접적인 피해를 받아 경제 위기를 또 다른 식민지 수탈로 극복하려 한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다. 일제는 조선에 국가 총동원령을 내리고 일제의 군수, 전쟁 수행을 위해 조선인을 강제 징용하고 전쟁 물자 조달을 위해 쇠붙이, 쌀 등의 곡식을 모조리 긁어가는 인적/물적 수탈이 이루어진다. 1930년대에는 조선의 모든 에너지는 일제의 전쟁 승리를 위해 쓰여져야 한다는 민족말살정책이 추진된다. 민중은 다시 살기가 어려워진다. 그래서 내선일체, 일선동조론을 바탕으로 황국신민화를 추진하였다. 이로 인해 창씨개명, 황국신민서사 암기, 신사참배, 일본어 사용 등이 강제로 행해졌다. 한국의 역사 교육, 한국어 사용과 한국 이름 사용은 전면 금지되었다.
3. 근대사
그러나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일본이 1945년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미국의 원자폭탄 두발에 무조건적인 항복을 하며 조선은 해방을 맞아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난다. 하지만 1945년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미영소의 외무장관이 모여 2차대전 후의 전 세계 질서를 협의하였는데 1948년까지 위도 38선을 기준으로 이북은 소련군에 의해, 이남은 미군에 의해 통치하는 것을 결정한다. 남북 단일 정부 구성은 실패하여 1948년 8월 15일 남한에서만 총선거를 거쳐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한 달이 채 안 된 9월 9일에는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된다. 남과 북은 극한 이념적 정치적 대결에서 출발하여 1950년 6월 15일 북한 인민군의 38선 월경을 통해 3년간의 한국전쟁이 발발한다. 미국을 위시로 한 UN 군은 남한을 지원했고 소련과 중국은 북한을 지원했으나 결국 3년간의 치열한 공방 끝에 38선 인근에서 휴전선을 남기고 전쟁은 중단되었다. 이후 현재까지 상호 대립하는 남북국 시대로 역사가 진행된다.
북한은 김일성이 남로당, 감신파, 소련파, 연안파 계열들을 차례로 숙청하면서 1인 독재체제를 확립하였다. 사회주의 이념을 기초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을 공포하여 중앙집권적 정치 안정성을 이룩하였으며 사상적으로는 주체사상을 규범화하였다. 1991년에는 남한과 북한이 동시에 UN에 가입하여 국제적으로는 한반도 2국가체제가 성립이 되었다. 1994년 김일성 사망 후 그의 아들이자 1980년대부터 후계자로 부상한 김정일에 의해 정권이 이어졌다. 김정일은 주석의 지위를 축소하고 국방위원회로 모든 권력을 통합하여 본인은 국방위원장 직함을 부여해 성공적인 권력 계승이 완성되었다. 김정일은 미국의 위협에 맞설 수 있는 군사력 증강을 위해 핵무기 개발에 몰두하여 전 세계의 고립 국가가 되었다. 김정일이 2012년 사망하자 그의 아들 김정은이 권력을 승계한다. 한때 남쪽의 문제인 대통령과 해빙무드를 통해 잠정적으로 핵시설을 폐쇄하는 것처럼 보이며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이후 남쪽에서는 우익 정부가 들어서 다시 급속한 냉전 관계로 변하였으며 핵시설 및 장거리 미사일 개발에 박차를 가하면서 다시 남한 및 미국을 위협하고 있다.
남한은 미 군정의 배경을 업고 이승만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대통령제를 통한 집권이 시작되었다. 이승만은 1954년 사사오입개헌, 정치깡패를 동원한 반정부 집회 탄압, 정적 제거 등으로 민심이 붕괴되어 1960년 4.19민주화 혁명에 의해 정권이 전복된다. 이후 등장한 장면 내각은 어수선한 민심이 들끓어 1961년 박정희 소장이 주도한 5.16 군사 쿠데타에 다시 정권이 바뀌게 된다. 정권 초반 민중의 요구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공포정치를 시행하여 1972년 유신 헌법을 통해 종신집권 체제로 돌입한다. 하지만 김영삼 의원 제명, YH 사건, 부마항쟁 등의 사회적 저항이 지속되던 와중에 권력 내부의 분열로 1979년 10·26사건을 통해 박정희가 김재규에 의해 총살당하면서 17년 장기집권은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당시 국무총리였던 최규하 내각이 같은 해 12.12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과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에 의해 짧은 집권을 마치게 된다. 전두환은 3S(Screen, Sports, Sex)로 대변되는 정책으로 민심을 유화하는 한편, 민주화 탄압, 고문, 정치사찰, 용공조작 등의 공포정치를 통해 정권을 장악하였다. 하지만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전국적인 민주화 요구가 커져 전국적인 6월 항쟁으로 퍼져 결국 정권을 내려놓게 된다. 이후 같은 하나회 출신인 노태우가 6.29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5년 단임제의 개헌이 이루어지고 노태우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새로운 정권을 세우게 된다. 이후 1992년 김영삼이 새로운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장면 내각 이후 30여 년 만에 문민정부가 세워진다. 김영삼 내각은 군부 숙청, 금융 실명제, 표현의 자유 허용,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 지방 자치제 부활, OECD 가입 등의 업적이 있었으나 정권 말기 1997년 IMF 구제 금융 신청으로 국가 부도 위기에 직면한다. 이후 집권한 김대중 정권은 금 모으기 운동을 통해 IMF 위기를 극복하고 대북 햇볕정책으로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을 평양에서 만나 남북정상회담을 실행하였다. 김대중은 이를 계기로 대한민국 최초로 임기 중인 2000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이후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권위주의 척결, 신자유주의 실현, 친미 외교 정책 등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후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명박은 4대강 사업, 자원 외교 등의 비리로 퇴임 후 수감되는 치욕을 겪었으며 다음 대통령으로 당선된 박근혜는 박정희의 딸이었는데, 그녀는 국정 농단 사태로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탄핵을 받아 대통령직에서 파면당하게 된다. 이후 대통령으로 당선된 문재인은 남북 판문점 정상 회담, 북미 정상 회담 성사 등의 대북 관계를 호전시켰으나 이후 당선된 윤석렬 정부의 친일, 친미, 반공 정책으로 남북은 다시 경색 국면으로 돌입하였다.
Daddy's Point of View ===============================================================
5천 년의 한민족 역사를 두 편의 포스트를 통해 훑어보았다. 흐름을 이해하는 것을 목적으로 간단하게 정리한다고 했으나 역시나 역사는 절대로 짧게 정리되지 않는다.
지금 대한민국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K-POP, 축구, 반도체, 자동차 등등이겠지만 근현대사를 보면 정말 어렵고 힘든 격동의 세월을 겪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의 평화로운 민주화 시대는 선열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국가를 위한다는 컨셉보다 민족을 먼저 생각한다면 과연 어떤 정치적 노선을 가지고 가는 것이 바람직한 것임을 알기 바란다.
이제는 너희들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만들어 가야 한다. 그러면서 5천 년간 독재와 외세에 대항해 목숨 걸고 지켜왔던 이들을 잊지 말길 바란다.
이후부터는 역사적 사건을 세계사, 국사를 아울러 포스팅을 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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