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단군왕검#부여#고구려
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학생들 같은 경우 수능이나 공무원 시험 준비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앞서 얘기했듯이 역사는 한편의 논픽션을 감상하는 재미가 있고, 보다 교훈적인 측면에서는 반복되는 역사 속에서 우리가 어떤 정치적인 노선을 갖고 대외 관계의 흐름 속에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을 하는 기준을 마련하는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국사를 통사적 개념으로 권력 구도 중심으로 간략하게 서술하겠다.
이후 포스팅에서는 사건 중심으로 깊게, 그리고 사건 속에 숨어있는 야사와 역사적 의미에 중점을 두고 이야기를 펼쳐 나가도록 하겠다.
1. 고대사
우리 문명 역사의 시작은 고조선의 건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실 고조선의 건국에서부터 출발하여 삼국의 건국까지 이르는 역사는 정설보다는 신화에 가깝다.
고조선은 삼국유사에 따르면 BC2333년 음력 10월 3일 단군왕검에 의해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여 건국되었다고 전한다.
지금도 10월 3일을 개천절이라 하여 그 뜻을 기린다. 단군왕검은 정치적 지도자 개념보다는 종교적 제사장에 가까웠다.
제정일치의 사회였으며 종교의 영향력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은 강력한 왕권을 가진 국가라기보다는 부족국가의 연합체 개념으로 보는 것이 옳다.
이후 위만조선, 기자조선으로 이어지고 BC108년 한무제에 의해 고조선이 멸망하여 이들 조선들이 있던 만주와 요동 지역에 낙랑군, 임둔군, 현도군, 진번군으로 구성된 한사군이 설치된다.
이후 BC4세기 왕족 연합체인 부여가 생겨나고 부여의 왕족 중 하나인 북부여의 왕 해모수의 아들 고주몽이 왕위 찬탈전에서 패해 부여를 탈출하여 BC37년 졸본, 지금의 요령성(랴오닝성)의 오녀산성에 터를 잡고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칭한다.
그는 추모성왕, 동명성왕으로 불린다.
왕권을 강화하여 3대 왕 대무신왕이 AD32년에 한사군을 정벌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고구려는 졸본 지역이 농사를 짓기에 적합하지 않은 땅이었으므로 주로 약탈과 침략으로 경제를 영위할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광대한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다.
2. 삼국시대
한편 고주몽의 부인 소서노는 BC18년에 그녀의 아들 온조와 비류를 데리고 남하하였는데, 비류는 지금 인천 지역인 미추홀에, 온조는 지금 송파 지역인 위례성에 정착하였다.
온조는 자신과 함께 내려온 10명의 신하와 함께 건국하였다 하여 국호를 십제(十濟)로 정하였다.
비류가 죽자 그를 따르던 식솔들과 가족들이 온조에게 흡수되어 국호를 백제(百濟)로 바꾸었다.
신라는 한반도 남쪽에 터를 잡고 있던 부족 연합 삼한, 즉 마한, 진한, 변한 중 진한에 속해서 경주에 터를 잡고 있던 사로국이 시조이다.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가 스스로를 거서간으로 칭하며 국호를 서라벌이라 정하였다.
BC57년 삼국 중 가장 먼저 건국하였다.
삼국은 서로 경쟁하며 왕국으로써의 기틀을 잡아갔다.
가장 먼저 전성기를 구가한 국가는 백제이다.
4세기 근초고왕 때 남쪽에 자리 잡고 있던 부족 연합인 마한의 일부와 탐라국을 정벌하였고, 북으로는 침공해 오는 고구려를 막고 오히려 평양성까지 진군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면서 북진을 꾀하였다.
뿐만 아니라 중국의 요서 지역(랴오시)까지 진출하여 대륙을 통치하였다.
이후 5세기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시절에 거란과 후연, 동부여, 백제를 정벌하여 만주와 요동 지역 대부분과 한강 북쪽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백제의 아신왕이 주도하여 신라에 백제, 가야, 왜의 연합군이 신라를 침입하자 광개토대왕은 5만의 기병과 보병을 신라로 보내 연합군을 격퇴하였다.
이후 고구려는 신라에 꽤나 심하게 신라의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대한 해협을 건너 왜까지 정복했다는 썰도 있다.
광개토대왕은 스스로를 태왕이라 칭하며 영락이라는 연호를 쓰며 자주성을 확립하였다.
영락은 한자로 永樂, 즉 영원한 즐거움이란 뜻이다.
장수왕 때 평양으로 천도하여 남진 정책을 꾀하여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하여 개로왕을 죽이고 백제로 하여금 웅진성으로 천도하게 만든다.
장수왕 때 고구려의 최대 영토를 확보하였으며 97세까지 살아 장수왕이라는 묘호를 받게 되었다.
장수왕의 아들 '고조다(高助多)'는 태자로 책봉되었었는데 아버지 왕이 너무 오래 장수하는 바람에 왕이 되기도 전에 아버지보다 먼저 죽어 왕을 해보지도 못하고 장수왕의 손자 문자명왕이 즉위하게 된다.
태자임에도 불구하고 왕이 되지 못한 '고조다'로 인해 지금 모자라는 사람으로 비하하는 '쪼다'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신라는 6세기 진흥왕 때에 이르러 삼국 중 가장 늦게 전성기를 맞이한다.
나제동맹을 통해 553년 고구려를 공격하여 북한강 유역을 넘어 함경도 지역까지 차지하였다.
욕심이 많은 진흥왕은 동맹국 백제의 성왕을 배신하여 한성을 포함한 한강 하류 지역을 점령해 영토를 확장하고 당나라와 직접 소통을 할 수 있는 길을 열게 되었다.
648년 진덕여왕은 당나라에 고구려와 백제 멸망을 도와주면 고구려 영토의 일부인 청천강 이북 지역을 당나라에 헌납한다는 조약을 통해 당과의 연합전선을 꾸렸다.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김유신이 신라의 정권을 장악한 후 당나라의 소정방을 필두로 한 13만 대군을 불러들여 660년 백제의 사비성을 함락하여 멸망하게 만든다.
신라는 당시 고구려의 실력자였던 연개소문이 죽고 그의 아들들의 권력 다툼과 연이은 전쟁으로 국력이 쇠약해진 고구려를 당나라 군대와의 연합 공격으로 결국 668년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이 당나라에 끌려가고 평양성이 함락되어 고구려는 멸망하였다.
이후 신라는 한반도 전체를 차지하려는 당나라의 대군과의 전쟁을 치렀는데, 676년 태종무열왕의 아들인 문무왕 때 금강 하구 기벌포에서 당나라 수군을 섬멸하여 당나라 세력을 제거하는데 성공, 삼국통일을 달성하였다.
고구려의 멸망 30년 후에 고구려 유민, 말갈족들이 대조영을 중심으로 옛 고구려 영토인 길림성 동모산에 698년에 발해가 창건된다.
이로써 통일신라와 발해의 남북국 시대가 열리게 된다. 대조영은 스스로를 천손이라 자처하고 독자적 연호를 제정하였다.
발해는 진국(震國 또는 振國), 진단, 해동성국으로 불렸다. 발해는 당의 정치적 문물을 적극 수용하여 중앙은 3성 6부제, 지방은 5경 15부 62주의 제도를 수립하여 중앙집권적 정치 체계를 완성하였다.
하지만 거란의 야율아보기가 세운 요나라와의 끊임없는 전쟁으로 국력이 쇠퇴하여 926년 거란의 침입을 받아 멸망하였다.
혹자는 백두산 화산 대폭발로 멸망했다는 썰도 있는데, 믿거나 말거나이다.
9세기 말 통일신라는 중앙에서의 왕위 찬탈전이 빈번하게 발생하여 정치적 혼란이 심각한 상황에 이른다.
중국에서도 북방민족의 세력이 강해져 당나라는 망하여 5대10국 시대의 혼란기에 접어들어 신라는 중국에 도움을 구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중앙에서의 지방 통제가 소홀해진 틈을 타 지방 호족들이 세력을 키운다.
그중에서 신라의 진골 왕족이었던 궁예가 901년 송악(지금의 개성)을 수도로 태봉(후고구려)을 건국하였고 신라 장수 견훤은 892년 완산주(지금의 전주)을 도읍 삼아 후백제를 건립하였다.
후고구려의 궁예는 승려였고 폭정을 일삼아 그의 휘하에 들어왔던 왕건은 901년 역성혁명을 일으켜 철원을 도읍으로 정하여 고려를 건국하였다.
3. 고려시대
고려는 친신라 정책을 써서 후백제의 공격을 도와주기도 하고 신라의 제도와 문물을 많이 수용하였다.
이에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은 935년 신라를 고려에 바쳐 신라는 멸망하게 된다.
후백제 역시 견훤의 아들들에 의한 왕권 다툼으로 인해 국론이 분열되어 국가의 기운이 기울어지게 된다.
후백제는 의자왕의 복수를 한다는 명분으로 신라를 끊임없이 침입하여 신라는 물론이거니와 신라와 친분관계를 맺고 있었던 고려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결국 후백제의 장군이 고려와 내통하여 10만 대권을 이끈 왕건의 군대에 견훤의 아들 신검이 항복하여 936년 멸망하게 된다. 이로써 왕건의 고려는 후삼국을 통일하여 봉건국가의 기틀을 다져간다.
왕건은 신라 말기 막강한 호족세력을 진정시키기 위해 유력 호족의 딸들과 혼인을 빙자로 중앙에 인질로 삼았다.
그래서 왕비가 무려 29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아울러 사심관 제도를 통해 지방 호족을 중앙 관리로 등용하고 기인제도를 통해 호족의 자제를 인질로 왕의 곁에 두게 하여 지방 호족들을 견제, 감시하였다.
이를 통해 중앙의 왕권은 안정되었으며 왕건은 후손들에게 남겨줄 훈요 10조를 남기고 죽는다. 왕건의 사후 지방 호족의 딸들에게서 태어난 아들들이 왕권을 차지하기 위해 왕족과 외척들 간의 엄청난 정쟁이 발생해 혼돈스러웠다.
이런 상황에서 4대 왕 광종은 무엇보다 왕권 강화에 전력을 기울였다.
노비안건법을 통해 귀족들 마음대로 사람들을 노비로 만드는 행태를 없앴고 중앙의 관리 채용을 직접 왕실에서 관장하는 과거제도를 시행함으로써 귀족들이 관직을 세습하여 세력을 확장하는 관습을 없애고 왕에게 충성할 수 있는 사람들로 관리들을 임명하였다.
10세기 말 성종대에 이르러 중앙집권적 제도가 완비되었다.
성종은 992년에 국자감을 설치하여 중앙집권적 인재 양성을 위한 관학을 발전시켰다. 문신 최승로가 건의한 시무28조를 완성하여 통지 규범도 확립하였다.
고려는 중국을 통일한 송나라와 친분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북방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는 이에 불만을 품고 고려를 침략하였다.
10세기 말부터 11세기 초까지 요나라는 3차에 걸쳐 고려를 침공하지만 1차 때 서희, 2차 양규, 3차 강감찬의 활약으로 요나라의 침략을 방어한다.
993년 1차 침입 때 성종에 의해 파견된 서희는 요나라 군사 8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한 소손녕 대장과 대적하여 한치 혀로 물리쳤다고 역사에서 칭송하나, 실제로는 송과의 관계를 끊고 요와 거래를 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인정받아 강동 6주 땅을 확보하였다.
1018년 요는 강동 6주 반환을 구실로 3차 침입을 한다. 하지만 강감찬의 귀주대첩 승리 등의 활약으로 요는 물러가고 요와 고려는 평화 관계를 구축한다.
요나라는 지속된 고려 침공에도 성공하지 못해 국력이 쇠해진 반면, 여진족은 세력을 키워 나가 금나라로 성장하게 된다.
여진족의 침공을 막기 위해 윤관은 15만 군사 규모로 별무반을 구성한다.
기병의 신기군, 보병의 신보군, 승려의 항마군으로 구성되어 있다. 윤관의 활약으로 여진족을 물리치고 동북 9성을 주는 대신 조공을 받는 조건으로 여진족과 화친을 맺는다.
12세기에는 외척이 득세하는 상황에서 1126년 인주 이씨의 이자겸이 난을 일으켜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고, 김부식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보수세력에 대항하여 1132년 묘청을 중심으로 한 지방 출신의 개혁파 관리들이 난을 일으킨다.
이후에는 이의방이 1170년 무신정변을 일으켜 약 120년간 무신이 집권하는 시기를 지나게 된다.
또한 농민과 노비의 봉기도 일어나 1198년 만적의 난이 발발한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가 (王侯將相寧有種乎)
▶ 1198년 최충헌의 사노비였던 만적이 난을 일으켜 외친 말이다.
당시 하층민들의 봉기는 단순 항거 수준이 아니라 신분 해방, 나아가 정권 탈취까지 목표로 삼게 되었다. 만적의 난은 최충헌에 의해 진압되고 만다.
13세기에는 북중국에서 부족 단위로 존재하던 몽골족이 칭기즈칸에 의해 통일되어 금나라를 복속하고 중국뿐만 아니라 멀리 유럽까지 정벌하며 세계 최강 국가가 된다. 몽골족은 중국에 원나라를 수립하여 주변 국들을 침략하여 1231년 고려까지 침략한다.
몽골에 저항하기 위해 삼별초를 결성하고 기병의 접근이 힘든 강화도로 천도하고 불심으로 외세를 격파하고자 팔만대장경을 조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토와 백성은 유린당하고 수많은 문화재가 유실된다.
이때 황룡사9층목탑은 신라 선덕여왕 때인 643년에 축조되었으며 약 80m가 넘는 높이의 규모로 어마어마했다.
1270년 원에게 항복하고 속국으로 전락하였다. 결사항전의 의지로 버티던 무신정권도 이때 붕괴되었다.
원나라에 충성한다는 의미로 충렬왕부터 충정왕까지 6대 동안 묘호에 충(忠)자를 붙이게 되었다.
고려 왕은 원나라 황제의 딸과 강제 결혼을 해야 했고 이로 인해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었다.
왜의 정벌을 위해 원나라 쿠빌라이 칸이 충렬왕에 강제 요구하여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에 걸쳐 출정하였으나 실패했는데, 이로 인해 고려에 막대한 인적 물적 피해를 입었다.
원나라 간섭기에 고려에 등장한 무신 세력과 무인 세력에 대항하는 신흥세력이 권문세가였는데, 원나라와의 통역을 하며 권력의 최측근으로 부각이 되어 1270년부터 1388년까지 권력을 잡았다.
이들은 농장을 운영하면서 농민을 수탈하고 양민을 억압하여 노비로 만드는 등 국가의 통치 질서를 위협하였다.
원의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는 14세기 중반부터 학문적 교양과 실무적 능력을 갖춘 신진 사대부가 득세하여 공민왕을 도와 원의 세력을 축출하고 자주적 국가 운영을 실시하였다.
원나라 순종의 손자 위왕의 딸이자 공민왕의 왕비인 노국공주는 반원정책을 펼쳤던 공민왕을 지원했다.
그러나 공민왕은 노국공주가 사망하자 개혁 정책의 엔진이 꺼져 술과 남색에 빠졌다.
이를 배경으로 제작된 영화가 "쌍화점(雙花店, 2008)"이다. 이에 이인임을 중심으로 하는 무식한 권문세가들의 반격으로 사대부의 핵심 신돈뿐만 아니라 공민왕까지 살해하여 우왕을 옹립하며 권력을 다시 잡게 된다.
이후 정권을 다시 장악한 신진사대부는 조준, 정도전 등의 역성 혁명파와 이색, 정몽주 등의 온건 개량파로 나뉘어 대립하다가 역성 혁명파가 승리하면서 1392년 공양왕이 폐위되어 고려는 멸망한다.
Daddy's Point of View ===============================================================
5천 년의 한민족 역사를 한 편의 포스트로 담기에는 충분하지가 않아 조선시대부터 2편을 정리하겠다.
우리 민족은 안타깝게도 외세의 침략에 시달려 왔다. 그 와중에 항상 수모를 당했던 것은 민중이었고, 지배층은 어려운 시국을 틈타 권력 싸움에 몰두하였다.
고조선부터 고려까지 외교적 시각이 탁월한 정권은 자주성을 가지고 강대국들에 대항했으며, 명분만을 내세웠던 정권들은 어려움을 겪는 고난의 역사를 써 나갔다.
과연 후대는 지금 대한민국의 역사를 어떻게 기술할 것인가가 정말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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