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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고려 중엽 삼별초의 난(1270-1273)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려고 해. 혹자는 삼별초의 난이라 하고 혹자는 삼별초의 항쟁이라 한다. 예전에 아빠가 학교 다닐 때 특별히 기억이 나지 않는 걸로 봐서는 두 가지다 쓰이지 않았나 싶어.
고려 무신정권은 고려 초기부터 지속되어온 문신 중심의 권력 구조로 인해 무신들을 무시했어. 중앙에 진출한 무신들은 주요 의사결정과정에서 소외당하고 군사업무만 수행하는 문신 따까리 역할 밖에 못했지. 무신은 목숨을 걸고 국경 방어와 외적 침략에 대응하는 중책을 맡으면서도 적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어. 게다가 고려의 18대 국왕 의종(毅宗, 1127-1173, 제위 : 1146-1170)은 문신들만 초대해 파티를 벌여 무신들을 대놓고 쌩깠어. 이러니 무신들은 입툭튀가 될 수밖에 없어 결국 의종 24년이었던 1170년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이 쿠데타를 일으켜 의종을 폐위시켜 거제로 유배를 보내고 허수아비 왕 명종((明宗, 1131-1202, 고려 제19대 국왕, 재위: 1170-1197)을 등극시키면서 실권은 무신들이 가져가게 돼. 이때부터 100년간 지속된 고려의 무신정권이 시작된 거였어.
이렇게 성공한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무신은 경대승, 이의민을 거쳐 최충헌(崔忠獻, 1149-1219)이 무신정권의 정점을 이루게 돼. 최충헌은 정권을 세습하면서 안정적인 권력 유지를 하게 되지. 몽골의 침략에 대한 강화도 천도 항쟁으로 약해진 최씨 정권 이후 김준, 임연, 임유무로 무신은 정권을 이어갔으나 결국 1270년 개경 환도와 더불어 임유무가 사형당하면서 무신정권은 종말을 고한다.
삼별초는 원래 최씨 집안을 지켜주는 사병 조직이었어. 별초란 임시로 조직된 선발군이란 뜻이야. 최충헌의 아들 최우가 집권하던 1219년 도둑을 막기 위해 야별초를 설치했어. 야별초는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는 정규군으로 편성이 되지. 그리고는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뉘어 조직이 커졌어. 이후 몽골에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한 이들을 따로 관리되었던 신의군을 포함해서 삼별초로 불리게 되었어.
당시 몽골은 1206년 칭기즈칸이 몽골족을 통일하고 중원뿐만 아니라 동서의 각국을 정복하여 거대 제국을 이루게 되었지. 그러면서 중원에서 쫓겨난 금나라의 잔당들을 소탕하려다가 고려까지 넘어오게 돼. 고려에서는 몽골을 도와 강동성(지금 평양의 동쪽 강동군)에서 금나라의 여진족 잔당을 소탕하였어. 이로 인해 몽골은 고려와 화친을 맺고 조공을 요구하였어. 그런데 조공이 점점 과해지고 몽골 사신은 그 오만함이 극에 달해 고려에서는 반몽 마인드가 퍼져 나갔지. 그러다가 1225년 고려에 왔던 몽골 사신 저고여(箸告與)가 고려에서 놀다 몽골로 돌아가던 중에 국경 근처에서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지. 몽골은 고려가 일부러 저지른 소행이라고 단정했지만 고려는 금나라 사람의 소행이라고 하면서 한 번만 봐달라고 했지만 결국 몽골은 고려와 단교하고 고려를 침공하기로 결정을 하지. 그래서 1231년 몽골의 오고타이 칸은 고려에게 저고여의 피살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항복하라는 국서를 보내지만 고려는 이를 무시하자 결국 살리타를 앞세워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함락하고 개경까지 엄청난 속도로 진격을 하지. 이에 고종은 쫄아서 몽골에 항복하고 개경과 평안도 일대에 다루가치라는 식민 통치관 72명을 배치하고 돌아갔어. 하지만 당시 왕을 우습게 봤던 집권자 최씨 가문의 최우는 몽골에게 강화의 무효를 주장해. 그래서 살리타는 다시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개경으로 진군했어. 최우는 몽골이 해전에 약하다는 것을 알고 왕과 조정을 이끌고 강화도로 천도를 해. 그러면서 지리한 공방전이 계속되면서 고려의 국토와 백성은 그야말로 생지옥이 되었지. 결국 1258년 항몽을 계속 주장한 최씨 정권의 마지막 집권자 최의가 살해당하면서 몽골과의 강화 기운이 생기게 되었어. 결국 1259년 당시 고려의 왕이었던 고종이 이름도 지랄맞은 몽골의 지랄타이에게 항복하고 이듬해인 1260년 고종이 죽고 제위에 오른 원종이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항몽은 끝나고 몽골의 지배를 받게 돼. 하지만 최의를 죽인 김준은 개경 환도를 반대하며 무신정권을 이어가면서 항몽을 지속하게 되지. 하지만 고려는 문신들에 의해 장악당했고 김준도 문인들의 손에 죽고 이후 무신의 정권을 이어오던 임연, 임유무도 결국 원종을 위시한 문신 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하면서 1270년 무신의 정권은 종말을 고하게 되지.
무신을 무찔렀다는 자신감에 원종은 출륙환도(出陸還都, 강화에서 나와 개경으로 수도를 이전)에 이어 삼별초를 해산하라고 명령하게 돼. 하지만 삼별초의 지도자 격인 지유(指諭) 배중손이 이에 반발하여 강화도에서 봉기를 일으켜. 사실 삼별초가 봉기를 한 이유는 고려의 왕실이 몽골과 결탁하여 백성을 저버린 것도 있지만 과거 무신정권의 군사적 기반이기도 했던 삼별초에 대한 고려 조정의 해산 시도 과정에서 삼별초의 명단이 몽골 조정에까지 넘어가게 되는 상황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어.
강화도 내에서 조정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지만 배를 타고 육지로 건너가 개경으로 가려는 사람도 많았다고 해. 이에 배중손은 육지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을 물에 빠뜨리거나 활로 쏘아서 죽였어. 그래서 강화를 지키던 대부분의 병사와 백성들이 육지로 도망치거나 그 와중에 죽임을 당해, 배중손을 비롯한 삼별초 지도부는 1270년 6월 선박과 군함을 모으고 모든 식솔들과 재물을 실어 강화도를 떠나 진도로 향했어. 그때 출항한 선박이 전부 1000여 척이나 되었다고 해. 출항하면서 삼별초는 공사의 서적들을 모두 불태웠는데, 개경으로 출륙한 주인의 명으로 강화도에 있던 주인의 재산을 정리하러 온 노비들 가운데 삼별초를 따라 남쪽으로 간 사람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 신분 해방을 꿈꾼 노비들 가운데 삼별초에 합류한 사람도 있었다고 해.
진도에 입성한 삼별초는 용장사를 행궁으로 삼고 용장산성을 거점으로 육지부 연해 고을을 향해 황명을 빙자하며 전라도 안찰사(全羅道按察使)에게 백성들의 추수를 독촉하고 섬으로 이주하게 하는 등 자신들이 고려의 유일한 정통 정부임을 주장했어. 이때 삼별초는 서남해 연안의 각 도서는 물론 육지부의 나주, 전주에까지 출병하여 고려 관군을 격파하고 위세를 떨쳤으며, 각 마을에 격문을 보내고 백성이 모두 진도에 호응할 것과 "별초를 가둔 자는 죄를 줄 것이다."라고 호령해, 금주(金州, 지금의 김해)의 수령 이주(李柱)가 무서워 싸우지도 않고 도망가는 등 경상도 연안과 육지부에까지 미치고 있었어. 11월에는 삼별초 군사들이 고려 관군이 지키고 있던 제주도까지 점령하였어. 고려 조정은 제주가 함락된 바로 다음 달에 군사 2백 명으로 남쪽에서 삼별초를 막게 하고, 몽골에서 조서를 가지고 온 반행적사 두원외(杜員外)를 원외랑 박천주(朴天澍)를 시켜서 호송하게 하여 삼별초에게 보내며 그들을 달래려 했어. 하지만 삼별초의 기세는 대단해서 진도를 거점으로 전라도 일대를 실질적으로 거의 장악하고 있었어.
삼별초군이 진도를 거점으로 삼은 것은 진도가 서남부 연안과 중앙을 연결하는 해로 상의 요지로 육지와 도서를 연결하는 교차점이며 남해와 서해의 조운로가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였기에, 남부 서남해 연안 지역으로부터의 세금을 확보할 수 있는 결정적 거점이었고, 과거 최씨 정권의 집권자였던 최항이 집권 이전에 진도의 사찰에서 활동했던 경력도 있는 등 무인정권의 중요한 기반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었다고 해. 진도 삼별초의 공세가 이어지던 원종 11년(1270년)에서 12년(1271년)은 몽골이 한창 일본 원정을 준비하면서 고려에 몽골 사신이 일본으로 가는 길을 안내할 것, 원정군의 양식을 고려에서 지급할 것, 고려 땅에 설치할 몽골의 둔전 경영에 필요한 소와 곡식 종자를 고려에서 제공할 것 등을 요구하고 있었고, 고려에서는 앞서 비축해 두었던 것은 육지부로 나오면서 삼별초에 다 빼앗겼고 그나마 남은 것도 지금 주둔하는 몽골군에게 대고 있는 데다 삼별초가 바닷가를 약탈하면서 조운이 제대로 되기 어렵게 되는 상황이었어.
고려와 몽골은 여몽연합군을 조직해 이듬해인 1271년 봄, 장마가 오기 전에 중군 좌군 우군을 조직해 세 방면에서 진도를 습격하게 되지. 그래서 삼별초에 의해 왕으로 추대된 승화후 왕온과 배중손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어. 왕온을 죽인 홍다구(洪茶丘)는 몽골의 장수라고 되어있는데 사실 고려 사람이고 그의 조상은 고려를 세운 개국공신이었어. 하지만 몽골이 쳐들어오면서 부원세력, 즉 몽골에 빌어 붙은 친몽파라 할 수 있고 아예 국적을 바꿔 원나라로 귀화해 장수가 되면서 일본 원정을 주도하게 되었어.
삼별초는 1271년 5월 여몽 연합군의 공격으로 근거지였던 진도가 함락되자 김통정(金通精)을 중심으로 제주도로 옮겨 갔고 여기서 지금의 경기도 부천까지 공격하며 사투를 벌였다고 해. 1273년 4월, 전선 160척에 탄 연합군이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제주도를 맹공했지. 김통정은 자결하고 남은 1300명은 포로가 되었어. 지금까지의 역사는 거기서 이들이 멸망했다고 보고 있지. 그런데 과연 포로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남김없이 전멸했던 걸까? 만약 살아남은 삼별초 세력 중의 일부가 가슴에 한(恨)을 품은 채 수평선 너머 남쪽으로 떠났다고도 하는데, 그러면 그들이 도착한 곳은 어디였을까. 제주도 남쪽으로 700~800㎞ 떨어졌으며 훗날 홍길동이 건너가 세웠다는 '율도국'이 바로 거기였다는 얘기도 전해지는 섬, 오키나와(沖繩)는 아니었을까. 그런데 이 이야기가 학계의 뒷받침으로 사실일 가능성이 커졌다고 해.
Daddy’s Point of View =======================
어찌 보면 삼별초의 봉기는 몽골에 항복하는 조정에 대한 반발과 몽골에 핍박받은 백성을 구하겠다는 명분은 분명 가치가 있다고 봐. 그리고 몽골의 사신 두원회와 고려의 원외랑 박천주가 삼별초를 만나 회유하였을 때, 삼별초는 이를 거부하고 전투를 벌이며 이들을 쫓아내면서 고려 원종의 국서에 대해서는 "명령을 따르겠다"고 하면서도 쿠빌라이 칸의 조서에 대해서는 "이 조서는 우리에게 보낸 것이 아니니 받을 수 없다"고 회답했고, 박천주와 함께 왔던 반행적사 두원외를 억류하는 등 고려의 자존심을 지키려 애를 쓴 모습이 보인다. 그렇지만 삼별초는 꺼져가던 무신의 불씨를 살려 정권을 유지하고자 했던 발악이지 않았나 싶다. 삼별초 역시도 대부도와 금주를 약탈하면서 백성을 못살게 굴었던 것도 민의를 대변한 조직이라고 보기 힘들었던 것 같아.
삼별초를 바라보는 시각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어. 진도에 도착한 1270년 8월부터 진도가 여몽연합군에 장악당한 이듬해인 1271년 5월까지 약 10개월간 실질적인 권력을 가졌던 배중손은 아직도 진도에서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그를 기리는 사원도 있어 삼별초를 하나의 혁명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는 걸 알아 둘 필요는 있겠지.
너희들은 삼별초가 혁명이었을까, 난이었을까, 어떻게 생각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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