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아빠의 역사 이야기

계엄령의 역사

by 브라보 오스카 2024. 12. 8.

 

 
▶ 2024년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는 장면이 TV에 생중계되고 있는 모습과 국회에 난입하고 있는 계엄군의 모습

“지금 이 시각부터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합니다… 저를 믿어 주십시오.”

 

2024년 12월 3일 밤에 갑자기 온 나라가 떠들썩했지. 갑자기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했다는 거야. 아니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계엄령이라니. 지금 권위주의 독재권력 시대도 아닌데 말이지. 결국 선포 4시간 만에 국회의 의결로 해제가 되었지만 계엄군이 국회에 난입하고 주요 정치 인사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지고, 명령에 따르지 않는 의료인들을 ‘처단’한다고 하니 뭔 일인가 했어. 그래서 오늘은 너희들과 계엄령과 관련된 역사 이야기를 풀어보려고 해.

 

그러면 먼저 계엄령이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자.

계엄령(戒嚴令, Martial Law)은 나라가 극도로 혼란스럽거나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을 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군대가 민간 정부 대신 통치권을 행사하도록 하는 제도야. 이는 국가를 보호하고 안정을 찾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만들어졌지만, 동시에 잘못 사용되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할 수 있는 강력한 도구가 될 수도 있지.

 

계엄령은 군사적 통치 체제로, 아래와 같이 두 가지 유형으로 볼 수 있어.

• 비상계엄: 외부로부터의 전쟁이나 반란 등으로 나라가 심각한 위협을 받을 때 발동된다.
• 경비계엄: 내부 치안 문제, 예를 들어 대규모 폭동이나 사회적 혼란 등으로 민간 질서가 무너질 위기에 처했을 때 발동된다.

 

계엄령이 발효되면 군대가 치안을 담당하고, 일반적으로 법원 대신 군사재판이 시행되며, 일부 기본권(집회·언론·출판의 자유 등)이 제한될 수 있어. 계엄령의 목적은 비상 상황에서 국가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함이지만, 오히려 권력자가 이를 남용해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거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한 사례도 존재하지.

 

우리나라 역사에도 여러 차례의 계엄령이 발효되었어. 우리나라 역사에서 첫 번째로 발효된 계엄령은 1948년 제주 4·3사건 때야. 당시 대한민국은 일제의 패망으로 일본군이 물러난 후 위도 38도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으로 나뉘어 각각 미군과 소련에 의한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던 때였지. 북에서는 김정일의 친소련 정권, 남에서는 이승만의 친미 정권이 통치하고 있었어. 한창 공산주의와 자유주의로 격렬한 이념 분쟁이 있던 시기였는데, 북은 공산주의 체제로 안정적인 정권 운영이 되고 있었지만 남에서는 자유주의 정권이 수립된 이후에도 두 개의 이념이 서로 적대시하며 심한 갈등을 겪고 있었지. 남에서 활동한 공산주의자는 북의 사주를 받고 있는 남로당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었어.

▶ 당시 신문에 실린 제주 4·3사건의 사진들. 토벌대에 의해 체포된 저항군(왼쪽)과 처형을 기다리는 주민들(오른쪽)

그러던 와중에 제주도에서 1947년 3·1운동 기념일에 거리에 모인 제주시민들이 미 군정 반대 시위를 벌이던 중 기마경찰에 의해 한 어린이가 밟혀 죽는 사건이 발생해. 이로 인해 시민들의 항의가 격한 시위로 번져 경찰은 시민에게 발포를 하고 시민들은 더욱 격렬하게 저항을 하였지. 그러면서 남로당은 이런 민심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반경 활동, 노동자 파업 등을 주도하게 돼. 남로당은 제주도를 거의 장악하였고 이 와중에 다음 해인 1948년 남한 단독 총선거가 결정이 되자 남로당은 이를 반대하였고 미 군정은 남로당을 불법단체로 지정해. 제주도에서 세력이 컸던 남로당은 곧장 군사적 행동을 갖추고 정부군과 미군을 상대로 제주도인민유격대를 창설해. 이들은 5월 10일 총선거가 있기 약 한 달 전인 1948년 4월 3일 유격대가 도내 12개 경찰서를 무장 습격하였어. 그러나 미 군정이 주도하는 5·10 총선은 치러졌고 8월 15일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게 되지. 제주도는 정부 수립 공표 후에도 여전히 갈등이 심했고 결국 이승만 정부는 11월 21일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대규모 군 병력을 증파해. 이때 선포된 계엄령에 의해 교통제한, 우편통신·신문잡지 등 검열, 부락민 소개, 교육기관에 대한 제한, 폭동에 관한 벌칙 등 7종목의 세칙이 발표되었어. 민간의 저항은 더욱 격렬했으며 이 소요 사태는 1950년 6월 제주도인민유격대 사령관 이덕구가 사살되면서 사실상 종결되었어.

 

이 사건으로 총 희생자는 제주도 인구의 10분의 1 정도인 2만 5천에서 3만 명 정도였고 대부분 민간인들이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역사적 사건이었지. 그런데 재밌는 건 당시 제헌국회에는 계엄법이 없었고 다만 일제 강점기의 계엄법이 여전히 효력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어. 그러니까 이승만 정권은 일제의 적통을 이어받은 정부였고 자기 맘대로 계엄령을 선포해 버린 거지.

 

그리고는 1949년 11월 24일에 우리나라 헌법에 대통령의 권한으로써 계엄령 법을 제정하였어.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에 있어서 병력으로써 군사상의 필요에 응하거나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 때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선포하는 명령이다라고 되어있어.

▶ 여순사건 당시 저항 세력자들을 색출 중인 진압군 모습

그리고는 제주 4·3사건이 채 해결되기 전에 여수와 순천에서 1948년 10월 19일 이른바 여수순천사건이 발생하여 이승만 정부는 10월 21일에 실질적으로 우리나라 헌법상의 계엄령을 최초로 선포하게 돼. 그리고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한국전쟁 기간 동안 다섯 차례의 계엄령이 선포되었어.

전쟁 이후에는 1960년 4월 19일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가 전국적으로 발생하자, 같은 날 오후 3시를 기해 이승만은 서울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계엄군을 출동시켜 학생들의 시위를 막도록 했어. 이후 시위의 전국적 확산에 따라 오후 5시부터 부산 광주 대구 대전 등 주요 도시로 비상계엄령이 확대되었어. 이로 인해 이승만 정권은 말로를 보이고 신헌법이 등장해서 의원내각제로 바뀌며 새로운 민주 정권이 창출되었어.

▶ 1961년 5월 16일,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소장

하지만 이듬 해인 1961년 5월 16일, 박정희가 주도하는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였다. 당일 새벽 쿠데타 군은 서울과 언론기관을 장악하고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하고는, 아침 9시를 기해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4·19혁명으로 탄생한 장면 정권을 해체시켰지. 이후 1964년 6월 3일 한일협정 반대투쟁, 이른바 6·3항쟁에 따른 계엄령, 1972년 10월 17일 10월 유신에 따른 계엄령, 1979년 10월 18일 부마항쟁 시, 1979년 박정희 사망 사건으로 비상계엄이 선포되었어. 그리고 1980년 5월 17일 전두환의 신군부에 의한 계엄령이 선포되고 이에 대응하여 5·18광주 민주화 항쟁이 발생했지. 이후 몇 차례 계엄에 대한 검토설과 위기설을 나돌았지만 이번 2024년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에 의해 선포된 비상계엄령은 1980년 이후 44년 만이다.

 

해외에서도 다양한 계엄의 역사가 있어 소개하고 넘어가 보자.

▶ 백악관에서 존슨 대통령 부부와 함께한 마르코스 대통령 부부(왼쪽)와 마닐라의 구두 박물관에 전시된 이멜다의 구두(오른쪽). 이멜다는 마르코스의 영부인으로 삼천 켤레 구두로 대변되는 사치와 향락의 끝판왕으로 유명했으며 마르코스 대통령에 반대하는 시위의 주요 원인이기도 했다. 이멜다는 아직 살아있으며 그의 아들이 지금 현재 대통령으로 집권하고 있다.

계엄령 하면 주로 독재국가에서 자주 일어나는데, 과거 필리핀에서는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Ferdinand Emmanuel Edralin Marcos, 1917-1989)이 1972년 계엄령을 선포하며 장기 독재의 길로 들어선 적이 있었어. 그는 공산주의 반란과 국가의 불안정을 이유로 계엄령을 발동했지만, 사실 이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거야. 마르코스 정권의 계엄은 필리핀 국민들에게 오랜 기간 억압과 빈곤을 가져왔어. 마르코스 대통령 역시 필리핀 국민의 처단으로 처참한 말로를 밟으며 해외를 떠돌다 하와이에서 죽었다.

그리고 2011년 이집트에서는 “아랍의 봄”이라 불리는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어. 당시 호스니 무바라크 정권은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했고, 군대가 주요 도시를 장악하며 시민들의 집회와 표현의 자유를 억압했어. 이 사건은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계엄령의 위험성을 보여줬던 사건이었다고 해.

 

미국에서도 계엄령이 발동된 적이 있었어. 남북전쟁 당시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연방 정부를 보호하기 위해 일부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어. 이로 인해 특정 지역에서는 언론과 시민의 자유가 제한되었지만, 당시 상황은 국가의 분열을 막기 위한 부득이한 선택으로 평가받기도 한다는 개소리가 있지.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여지니 이런 평가도 나오는 거지. 미국이 하면 뭐든지 다 잘한 거래. 쩝.

 

계엄령은 국가가 극단적인 위기에 처했을 때 필요한 수단이 될 수 있는 헌법적 조치이지만, 그만큼 남용될 가능성도 클 수밖에 없지. 특히 우리나라의 역사에서처럼 계엄령이 정권 유지를 위한 억압의 도구로 사용된 사례를 보면, 그 위험성을 더욱 실감할 수 있어.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하고, 정부의 권력 남용을 막기 위한 견제 장치가 중요하겠지. 계엄령 발동은 마지막 수단으로만 사용되어야 하고, 무엇보다 투명성과 국민의 신뢰가 필수적으로 선결되어야 해. 그러니까 계엄령은 한 나라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중요한 제도이지만, 잘못 사용되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할 수 있는 위험한 도구가 될 수도 있어.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야.

▶ 계엄 해제 발표하는 윤석열 대통령

우리나라의 광주 민주화 운동이나 필리핀의 마르코스 정권처럼 계엄령이 잘못된 방향으로 쓰인 사례는 국민의 힘과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보여줘. 우리는 서로의 자유를 존중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키는 노력을 해야 해.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위한 나침반이다.”

 

이 말을 기억하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모두가 힘을 모으는 것이 중요하단다.

 

Daddy’s Point of View =================================

이번 윤석열의 계엄 선포는 초연결시대에 적절치 않은 명분과 부족한 권력 및 지지기반의 크기, 어설픈 초식으로 세간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어. 12·3 계엄으로 역사에 기록될 이번 사태는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쪽팔린 사건이 아닐 수 없어. 이 해프닝으로 인해 국가적 주요 행사가 취소되고 국격은 실추되고 주가 및 신용도 같은 경제 지표도 추락하고 말았지. 한 사람의 무능과 무식한 결단은 결국 국민들에게 그 피해가 돌아가는 것이니 지도자의 한 걸음은 매우 무겁고 중요한 것임을 너희들은 잊지 않길 바래.

되짚어 보면 계엄령을 발동한 국가수반들의 말로는 참으로 비극적으로 끝났어.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마르코스, 심지어 에이브러햄 링컨까지. 이렇게 보면 왠지 계엄령은 건들면 안 되는 예쁜 독버섯과 같은 것이 아닐까 해. 과연 윤석열의 말로는 어떻게 될까? 진짜로 탄핵으로 갈까?

 

#계엄령 #윤석열 #제주4·3사건 #여수순천사건 #마르코스 #아랍의봄 #남북전쟁 #광주민주화항쟁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