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은 인류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사건이었지. 유럽 중심의 세계질서에서 미국과 소련의 구도로 재편되면서 제국주의는 소멸되고 이념으로 전 세계가 양분되었어. 즉, 미국 중심의 자유주의와 소련 중심의 공산주의로 대표되지. 서로 엄청난 적대감을 보이며 핵전쟁 세계대전의 불안감으로 전 세계는 공포에 떨었지. 2차 세계대전 이후와 소련의 몰락까지의 이 시기를 우리는 냉전시대라고 해. 물론 지금은 공산주의는 거의 소멸되었고 자유주의도 공산주의의 사상과 실천을 일부 받아들이면서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고 볼 수 있어. 냉전 시기의 극단은 아마도 미국에서 일어난 매카시즘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면 오늘은 매카시즘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우선 매카시즘(McCarthyism)의 정의부터 알아보자. 매카시즘은 미국의 공화당 출신 상원 의원 조지프 메카시(Joseph Raymond McCarthy, 1908-1957)의 이름을 따서 생겨난 용어로, 1950년대 초반 미국 사회에서 벌어진 무차별적인 공산주의자 색출 운동과 마녀사냥을 의미해.

그러면 매카시에 대해서 좀 알아보도록 하자. 매카시는 아일랜드계 미국인이었고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어. 1939년 서른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위스콘신주의 지방 판사로 선출이 되고, 1946년 공화당 소속으로 상원 의원에 당선이 되면서 정계에 입문을 하게 되지. 원래는 루스벨트 대통령을 지지하는 민주당원이었는데, 실제로 선거에 나갈 때는 공화당 간판을 달고 나가지. 매카시는 어떻게 보면 듣보잡 정치인이야. 그런데 어떻게 그가 정계에 입문을 하고 그리고 52년에 재선에 성공할 수 있었을까? 바로 그를 지지해 주는 세력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게 바로 케네디 가문이었던 거야. 케네디 가문 역시 매카시와 같은 아일랜드계이며 독실한 카톨릭이었다고 해. 그래서 케네디 가문에서 가장 유명한 존 F 케네디가 대통령으로 당선이 되었을 때 미국 최초의 카톨릭 대통령이다라는 말까지 나왔어. 케네디 가문의 출발은 JFK의 아버지인 조 케네디(Joseph Patrick "Joe" Kennedy, Sr. 1888-1969)라고 볼 수 있어. 그는 금주법 시대에 주류 밀매업으로 마피아와 손잡고 큰돈을 벌고 그 재력으로 정계에 진출하려 했다고 해. 그는 알았던 거지, 진정한 힘은 돈이 아니라 정치권력에서 나온다는 것을. 그래서 루스벨트 대통령 시대에 증권거래위원회장을 맡았고 주영대사로 근무를 하게 되지. 하지만 그의 지저분한 과거 경력으로 인해 정계 입문이 힘들어지자 매카시를 밀었다고 해. 그는 매카시의 출신뿐만 아니라 그의 불도저 같은 성격으로 적을 몰아붙일 때는 정말 잔인하리만큼 매몰차고 냉정하게 밟아버리는 면이 조 케네디를 매료시켰다고 해. 그래서 그가 상원 의원에 당선될 때 엄청난 정치 자금을 대줬다고 해. 실제로 그는 인터뷰에서 "그냥 몇천 달러 줬어"라고 이야기했지만 실제로 50만 달러 정도를 지원해 줬을 것이다라는 얘기가 있어. 나중에는 매카시가 조 케네디의 아들들이 정계에 진출하는 데 적극적이고 결정적인 도움을 주면서 조 케네디에 보은을 했다고 하지.
암튼 메카시는 1950년 2월, 웨스트버지니아에서 열린 연설에서 “미국 국무부 내에 공산주의자가 205명 있다”고 폭로하며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고, 이를 계기로 정치적 권력을 얻으며 대대적인 반공 캠페인을 주도했어. 메카시와 그의 추종자들은 공산주의자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에 동조한다고 의심되는 인물들까지 무차별적으로 고발, 조사했다고 해. 이를 통해 미국 사회 전반에 걸쳐 공포와 의심을 조성했지. 매카시즘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적 긴장 상태, 특히 냉전 시대 초기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전쟁이 끝난 후 미국과 소련은 서로 경쟁하며 이념적 대립이 심화되었고, 1949년에는 소련이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하며 무력의 균형이 바뀌었어. 같은 해 중국에서 공산당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아시아에도 공산주의 확산에 대한 우려가 커졌어. 또한,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미국 국민들에게 “도미노 이론”을 확산시키며 공산주의가 확장될 것이라는 공포를 더욱 심화시키게 되지. 미국 정부는 이 과정에서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해 더욱 강력한 반공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고, 이는 내부의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하려는 움직임으로 이어졌어.
미국 내에서는 1930년대 대공황 이후에 등장한 여러 사회 개혁 프로그램들이 공산주의와 유사하다는 인식이 보수층 사이에서 확산되기 시작했어. 특히, 노동운동이나 인권운동이 활성화되면서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이를 공산주의적인 위험으로 간주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정치인들 역시 반공주의를 강력히 주장하게 되지. 또한, 전후 경제가 성장하면서 미국 사회는 “애국”과 “자유주의”라는 가치를 중시했고, 이를 위협하는 모든 사상을 경계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어. 메카시는 이러한 반공주의적 정서를 자신만의 권력 도구로 삼아 정치적 입지를 굳혔고, 공산주의자 색출을 명목으로 정치적 반대자와 잠재적 경쟁자를 제거하는 수단으로 매카시즘을 활용했던 거야.
매카시즘은 많은 사람들을 재판으로 이끌면서 멀쩡한 사람도 사회의 반역자로 지탄을 받는 경우가 많았어. 그중에서 미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며 펼쳐진 대표적인 사건 중 하나가 바로 할리우드 블랙리스트 사건이야. 당시 연방 하원 비미국활동위원회(HUAC)는 할리우드와 영화계 내에서 공산주의 사상이 은밀히 퍼지고 있다는 이유로 수많은 영화인들을 공산주의자로 의심하여 조사했어. 이 과정에서 영화감독, 배우, 작가들이 블랙리스트에 올라 영화계에서 활동하지 못하게 되었지. 할리우드 블랙리스트 사건은 영화와 문화 예술계에서의 표현의 자유와 창작의 권리를 억압했고, 무고한 사람들이 “공산주의자”로 몰려 사회적으로 매장되는 심각한 인권 침해의 예로 남게 되었어. 영화인들은 자신이 공산주의자라는 사실을 부인하거나 증언을 거부했을 경우, 즉각 블랙리스트에 올라 오랜 기간 동안 사회적, 경제적으로 큰 피해를 입어야 했지. 이 사건은 미국의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 사례로, 매카시즘이 얼마나 극단적으로 진행되었는지 볼 수 있지. 영화인 찰리 채플린, 극작가 아서 밀러, 레너드 번스타인, 시인 및 극작가인 베르톨트 브레히트 등이 대표적 피해자로 볼 수 있고, 반대로 로널드 레이건, 엘리아 카잔, 월트 디즈니 등의 반공주의자들은 매카시즘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며 꽃길을 걷게 되었지.

또 다른 중요한 사건으로는 매카시가 군부를 대상으로 공산주의자 색출 작업을 시도했던 ‘육군-메카시 청문회’(Army-McCarthy Hearings)가 있어. 매카시가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리고 만거지. 매카시는 군대 내에 공산주의 세력이 침투했다고 주장하며 조사에 착수했지만, 이 과정에서 그의 무리한 주장과 과격한 행동들이 폭로되게 돼. 특히 이 청문회는 텔레비전으로 전국에 생중계되어 메카시의 비윤리적이고 비합리적인 수사 방식을 대중에게 그대로 보여주었고, 이는 그의 몰락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지. 당시 미국에 TV가 막 보급이 되기 시작한 시점에서 약 2천만 명의 시청자가 보는 가운데, 청문회에서 매카시는 항상 그래왔듯이 육군 쪽 변호사 조지프 웰치(Joseph Welch)에게 공산주의 혐의를 막 뒤집어 씌우며 몰아붙이니까 “의원님, 이건 그만하면 안 될까요? 충분히 하신 것 같습니다. 의원님에게는 최소한의 체면도 없는 것입니까? 결국 아무런 품격도 남지 않으셨군요!“라는 날카로운 비판을 받으며 공감을 얻지 못했고, 이는 미국 내 반공주의적 여론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어. 이 순간이 매카시즘이 무너진 순간이다라고들 이야기하고 있어. 미디어의 힘이 여기서도 보였던 거지.

결국 매카시즘은 1954년 매카시가 육군을 대상으로 공산주의자 색출에 나선 사건을 계기로 그 정점에서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했어. 메카시의 주장은 점점 증거가 부족하고 과장된 것으로 판명되었고, 미국 국민들과 정치권도 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기 시작돼. 아울러 1954년 3월 9일 CBS에서 방영한 미국의 전설적인 언론인 에드워드 머로 기자의 <See It Now>라는 시사 프로그램에서 머로 기자는 매카시의 주장을 조목조목 밝혀 그의 주장이 거짓이라고 주장했고, 매카시즘에 피로를 느끼던 미국인들은 사상의 자유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지. 방송 이후 하루 동안 CBS에 접수된 12,000건의 전보와 전화 중 머로를 지지하는 비율이 15 대 1이었다고 해. 1954년 상원은 메카시를 “비신사적 행위”로 규탄하는 징계를 내리며 그의 영향력을 약화시켰고, 그 이후로 메카시는 정치적 입지를 잃게 되었어.
매카시는 순식간에 대중의 관심을 잃었고, 의원직을 유지할 수는 있었으나 동료들과 아이젠하워 행정부에게 완전히 버림받은 상황에서 마지막 세월을 보냈어. 절망으로 가득 찬 그는 매일 아침 늦게 일어나 하루 종일 텔레비전 연속극을 보며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었고 사람들과도 잘 만나지 않았고 1957년 매카시 부부는 한 명의 입양아 말고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고 해. 그는 술에 빠져 지내던 것으로 추정되며 1957년 5월 9일 48세의 젊은 나이에 급성 간염으로 사망하였지. 인생무상이 따로 없는 것 같아.
결과적으로, 매카시즘은 냉전 초기의 공포와 불신을 반영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이를 통해 미국은 정치적 탄압이 초래할 수 있는 위험과 표현의 자유의 중요성을 재확인하게 되었어. 매카시즘은 한 인물이 주도한 운동이었지만, 이는 단순한 개인적 욕망을 넘어선 시대적 분위기와 사회적 불안감이 낳은 산물이었다 할 수 있지.
Daddy’s Point of View ====
우리나라에서도 매카시즘의 광풍은 피할 수 없었어. 이승만의 반공정책, 제5공화국의 안기부 등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지. 이념과 사상이 결국 멀쩡한 사람을 죽이고 폭동이 일어나는 어처구니없는 나비효과를 보여주게 되었어.
약간 결이 다르기는 하지만 이번에 재당선된 트럼프의 사상도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고 봐. 트럼프는 철저한 미국 우선주의를 펼치며 흑과 백으로 세계를 구분하면서 어찌 보면 성격과 상대는 다르지만 매카시즘적 성향을 보이고 있는 것 같기도 해. 본인의 생각과 다르면 그것은 거짓이며 중도는 없고 나 이외는 모두 적이어서 쳐부수고 굴복시켜야만 되는 사상과도 비슷한 것 같아.
#매카시즘 #공산주의 #소련 #조지프매카시 #반공주의 #육군-매카시청문회 #조지프웰치 #케네디가문 #조케네디 #에드워드머로 #이승만의반공정책 #제5공화국안기부 #트럼프 #나비효과
'아빠의 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별초의 봉기는 난인가, 항쟁인가? (3) | 2024.12.01 |
---|---|
고대의 불빛이 만든 신비로운 이야기 - 파로스의 등대 (0) | 2024.11.17 |
리더십의 기본, 패닉에 빠지지 않는다 – 마라톤 전투 (3) | 2024.11.03 |
가문의 영광 - 노벨상 (4) | 2024.10.19 |
부패는 혁명을 부른다 : 유럽의 종교개혁 (3) | 2024.10.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