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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역사 이야기

살라미스 해전 - 위대한 팔로워 없이 위대한 리더 없다

by 브라보 오스카 2024. 12. 9.

#리더십 #팔로워십 #살라미스 #페르시아 #키루스 #다리우스 #아테네 #그리스 #크세르크세스 #테미스토클레스 #라우리온

 

오늘은 세계 3대 해전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살라미스 해전에 대해서 이야기를 풀어보려 해. 살라미스 해전은 페르시아와 그리스 연합이 BC480년 에게해의 살라미스 해협에서 벌어진 해전이야. 이 전쟁 이야기에 대해서 해보기 전에 페르시아가 어떤 나라였는가를 먼저 살펴보도록 할게.

▶ 키루스 2세는 아랍권뿐만 아니라 그리스에서도 자비롭고 이상적인 군주로 존경을 받았다. 그는 바빌로니아에 잡혀있던 유대인을 해방하여 구약성경에도 고레스로 모사되고 있다. 그의 무덤은 파사르가다에에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페르시아 제국은 고대 가장 위대한 제국 중의 하나였어. BC544년경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였던 바빌론의 거대한 성문 앞에 기병 부대와 함께 서있는 한 남자가 있었어. 그는 바로 키루스 2세였어. 보잘것없이 보이는 기병 부대와 키루스 자신이었지만 사실 굉장한 용감함으로 바빌론을 단숨에 점령해 버리고는 페르시아 제국을 이룩하게 되지. 페르시아 사람들은 전 세계를 정복하고 나면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계가 된다고 믿었어. 그래서 인류 역사상 최초로 세계 정복을 꿈꾸며 팍스 페르시아나를 이루려 했지. 페르시아의 황제들은 이웃나라를 정복하기 시작했고 이집트에서 인도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거느리게 되었어. 기원전 522년 다리우스 집권 하에 페르시아의 최전성기는 시작되지. 중국을 제외한 모든 문명사회를 병합했다고 해.

▶ BC500년경 다리우스 집권 하의 페르시아 영토. 동으로는 인도, 서로는 이집트까지 걸쳐있는 광활한 제국을 건설하였다. 하지만 페르시아-그리스 전쟁에서 패하면서 곧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지배를 받는다.

 

페르시아 제국은 BC5세기가 되면서 그리스로 제국의 영역을 넓히고자 했어. 하지만 BC490년 첫 번째 침공의 마라톤 전투에서 그리스의 아테네군에게 어이없는 대패를 하고 말아. 이 1차 침공의 실패는 페르시아 제국을 여러모로 곤란하게 만들었어. 이후 10년 동안 제국 안의 여기저기에서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이지. 그리고 이 과정에서 황제 다리우스 1세가 죽고 말아. 아버지의 유지를 받든 크세르크세스는 제국이 다시 안정을 찾자 곧바로 그리스에 대한 2차 침공을 준비하지.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저서 ‘역사’에 의하면 페르시아 제국은 100종류가 넘는 무기들을 지닌 100개의 종족으로부터 무려 100만의 군대를 동원했다고 해. 과장이 좀 있긴 하지만 당시 페르시아 제국의 군대 규모는 25만을 충분히 넘었을 거라고 학자들은 이야기하고 있지. 1차 침공 때 병력이 2만 5천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10배가 되는 병력으로 그리스를 쳐들어오게 된 거지. 특히 페르시아는 그리스 정복을 목적으로 해군도 총동원을 하게 돼. 페니키아와 이집트, 이오니아 등지에서 무려 1천2백 척에 달하는 함선을 징발했어.

▶ 난세의 영웅 테미스토클레스의 흉상
 

그리스 역시 이미 한차례 전란을 겪은 만큼, 지난 10년 동안 페르시아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어. 이윽고 페르시아가 대규모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감지되었고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코린트에서 도시 국가들 간의 전쟁 회의를 개최하지만 700여 개의 그리스 본토 도시국가들 중 회의에 참석한 국가들은 겨우 30개 남짓이었어. 적의 침공을 앞두고도 그리스는 심하게 분열된 모습을 보였어.

 

하지만 난세에는 영웅이 나오는 법이지. 아테네의 집정관을 지낸 바 있고 마라톤전투에도 참전했었던 테미스토클레스(Θεμιστοκλῆς, Themistocles, BC524-BC459)가 바로 그 영웅이었어. 그는 마라톤전투 후 모두가 환호하고 있을 때, 홀로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어.

‘만약에 우리가 마라톤에서 페르시아를 이기지 못했다면?’

‘그리고 페르시아가 또 쳐들어온다면?’

스스로에게 질문하며 테미스토클레스는 미래를 걱정하고 있었지.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려.

‘페르시아군이 그리스 본토에 상륙하기 전에 막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 해군을 양성해야 한다.’

하지만 해군 양성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지. 당시 3단 노선 1척을 건조하는데 드는 비용이 평범한 시민 1명의 32년 치 연봉에 해당하는 엄청난 자금이 필요했던 거야. 테미스토클레스는 냉정하게 계산을 해보았어. 군항 건설, 군함 200척, 4만 명의 노잡이가 있어야 페르시아 군을 해상에서 저지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려. 그리고 이 사실을 전쟁 회의에서 역설했어. 하지만 아직까지 가난했던 그리스 도시국가들에게 이러한 주장은 터무니없었어. 그렇게 테미스토클레스의 주장은 묵살되었지.

▶ 되는 집은 된다. 가난한 그리스에 은광이 발견될 줄이야. 라우리온 은광의 막대한 재력으로 전쟁을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신은 결국 그리스의 편이지 않았나 싶어. 갑자기 BC483년 아테네 인근 라우리온 광산에서 은의 샘이라 불릴 정도로 풍부한 광맥이 새로 발견되었던 거야. 광산이 발견되자 보수파를 비롯한 많은 그리스인들은 이 은을 공평히 나누자고 주장했어. 당연했겠지, 눈앞에 돈이 보이는데. 하지만 테미스토클레스는 은 광산에서 거둔 수익을 군함 건조에 쓰도록 아테네 시민들과 의회를 다시 한번 설득하지. 그리고 마침내 아테네 인들은 200척의 군함을 만들기로 결정해. 전쟁 직전까지 아테네는 180척의 군함을 건조할 수 있었던 거야. 테니스토클레스가 말한 200척에 거의 다다른 숫자였던 거야.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페르시아의 함대가 그리스로 들이닥치게 되는데, 이것이 BC480년 9월에 발발한 그 유명한 살라미스 해전이야.

▶ 살라미스 해협으로 유인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끈 그리스 연합 함대. 그리고 영화 300에서 함대를 이끈 페르시아의 제왕 크세르크세스. "짐은 관대하노라"

그리스로 거대 함대를 이끌고 오는 페르시아의 황제 크세르크세스는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어. 그도 그럴 것이 페르시아가 동원한 군함의 수는 거의 천 척이 넘었기 때문이지. BC480년 9월 25일 아침이 되자 크세르크세스의 페르시아 연합 함대는 살라미스 해협으로 밀고 들어와. 하지만 주변 해역의 지형지물에 익숙했던 그리스 함대는 해협 안쪽 좁은 곳으로 페르시아 함대를 유인했어. 좁은 공간에서 기동력을 상실한 페르시아 함대는 이윽고 자기들끼리 뒤엉키게 되었고 바로 이 타이밍에 그리스 함대의 총공격이 시작되지. 날렵한 선체의 그리스 군함들은 뱃머리를 들어 올려, 페르시아 함선들의 노를 부러뜨리며 기동 불능 상태에 빠뜨렸어. 그리고 양쪽에서 충각으로 들이받았지. 막강했던 페르시아의 함대는 맥없이 격파되었어. 압도적인 전력 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연합은 이 단 한 번의 해전으로 모든 상황을 역전시킨 거였지.

 

Daddy’s Point of View ==========================

많은 역사가들이 살라미스 해전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어.

“불굴의 정신을 가진 그리스인들을 찬양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 불굴의 정신을 가지게 되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현실을 냉정히 판단하고 미래에 대한 건전한 혜안을 가진 리더의 존재였을 것이야. 만약 테미스토클레스의 해군 양성론이 먹히지 않았다면 아마 크리스-페르시아 전쟁에서 그리스는 한낱 페르시아의 속국으로 전락했을지도 모를 일이었지. 또한 그의 뛰어난 리더십을 돋보이게 했었던 것은 그의 주장을 받아들여줬던 아테네의 다른 지도자들이었던 거야. 즉, 리더십을 받쳐줄 팔로워십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봐. 리더십만 팽배해 있다면 그 조직이나 단체는 힘을 받을 수가 없을 거야. 너 나 없이 방향만을 제시하고 따르는 사람은 없어 결국 그 조직은 산으로 가게 되지. 훌륭한 리더는 결국 훌륭한 군중에서 나오는 법이라는 걸 새삼 강조하고 싶어. 역사에는 비록 리더만 남지만 우리는 항상 이런 팔로워들을 기억해야 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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