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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파리 하계올림픽에서 주목을 끌고 있는 팀 중의 하나가 미국의 농구팀이 아닐까 한다. 당연히 우승할 것이라 믿는 여론이 대세이고 실제로도 우승을 했다. 문제는 어떤 경기력과 최고의 몸값을 자랑하는 팀 멤버들이 어떤 뉴스들을 만들어 내는지가 더 관심일 것이다. 그들을 일컬어 드림팀이라 한다.
그렇다면 드림팀은 언제 어떻게 유래가 되었을까? 시작은 1988년 대한민국을 전 세계에 알리게 된 서울올림픽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올림픽에 출전할 때 대학농구단 NCAA 출신들로 선발했다. 즉 대학생들이 미국의 대표팀으로 출전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올림픽에서 항상 우승을 했었다. 하지만 88 서울올림픽은 상황이 달랐다. 준결승에서 맞붙은 소련과의 경기에서 패해 3위의 성적으로 대회를 마무리했다.
미국의 여론은 패한 대상이 전세계 패권을 놓고 경쟁한 소련이었기에 자존심의 상처와 경쟁심의 자극을 동시에 강조했다. 그래서 당시 최고의 농구선수들이 모여 있는 프로리그 NBA 현역 선수들을 대표팀으로 해야 한다는 여론이 커져갔다. 그리하여 당시 NBA 총재였던 데이비드 스턴 David Joel Stern은 NBA 선수들의 올림픽 참가를 허용했으며 국제 농구 연맹 FIBA Federation of International Basketball에도 올림픽에 프로 선수들이 뛸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FIBA도 올림픽을 비롯해 각종 국가 대항전에서 수익 증대와 관심 증가를 원하고 있던 상황이라 소련 등 일부 국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를 승낙하게 된다.
NBA 선수들의 올림픽 참가 허가를 받은 미국 입장에서 이제 해야 할 일은 세계 최강 미국 대표팀 선수들을 NBA 선수들로 채우는 일이었다. 일명 드림팀 결성의 서막이 올라간 것이다. 곧바로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참가할 대표팀 선발을 위해 대표팀 선발 위원회가 조직되었고 의장으로 로드 쏜 Rodney King Thorn NBA 수석 부사장이 최고 책임자로 임명된다. 그는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의 척 데일리 Charles Jerome "Chuck" Daly 감독을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하고 계속해서 NBA 최고의 선수들을 영입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첫번째로 영입 대상은 두말하면 잔소리, 이 선수였다. 마이클 조던 Michael Jeffrey Jordan. 하지만 그는 참가 의사를 보류한다. 그는 이미 1994 LA 올림픽에 참가해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비시즌에 골프 치면서 놀아야 하는데 훈련과 대회에 참가해야 하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이유였다. 놀아야 하는데 귀찮다 이거지. 머 돈이며 영광이며 이미 다 가진 그였기에 쉽사리 설득 논리를 찾기 힘들었다.
로드 쏜의 허탈한 발걸음은 올림픽에 참가하지 못했던 노장 매직 존슨과 래리 버드에게로 옮겨졌다. 올림픽이 4년마다 개최되는 터라 타이밍이 맞지 않으면 NCAA 소속이 될 수가 없었다. 이 두 선수는 서로 라이벌 구도를 구성하며 당시 NBA의 인기를 최고로 높여 놓은 상징적 인물들이었다. 역시 이 두 사람도 쉽사리 OK를 하지 못한다. 매직은 HIV에 감염되어 잠정적 선수 생활 중단 상태였고 버드도 당장 은퇴를 해도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는 심각한 허리 부상으로 힘든 상황을 보내고 있었기에 두 선수 모두 대표팀 합류가 힘든 상황이었다. 하지만 매직은 올림픽 금메달 타이틀이 없었기에 흔쾌히 승낙을 하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매직은 다른 선수들 영입에 적극적으로 앞장서게 된다. 매직이 제일 먼저 접촉한 인물은 래리 버드였다. 부상으로 인해 은퇴를 코앞에 두고 있던 상태임을 뻔히 알면서도 "그냥 코너에 서 있거나 top of the key에 서 있기만 하고 아무것도 안 해도 돼. 내가 공을 줄 테니까 그냥 쏴서 넣기만 하면 돼. 아직 그건 할 수 있지?”라며 설득했다. 다음으로 찾아간 사람이 바로 마이클이다. 마이클에게는 "자네와 래리랑 함께 뛰는 건 내 버킷리스트에 있었고, 셋이 같이 뛰면 재밌을 거다"라고 하면서 이미 버드를 설득했다고 했다.
80년대와 90년대 코트를 주름잡던 세사람이 대표팀에 합류하자 상황은 달라진다. 다른 스타들의 대표팀 합류가 더 이상 고민의 대상이 아닌 영광의 자리로 변했다. 하킴 올라주원에게 최고의 센터자리를 내주며 이인자로 내려앉았지만 여전히 슈퍼스타의 대열을 구성하고 있던 패트릭 유잉, 88년 CCCP에게 복수의 기회를 갖고 싶다는 데이비드 로빈슨이 합류하게 된다. 스코티 피펜, 찰스 바클리로 우주 최강 포워드를 구성한다. 리그 최고의 슈터 크리스 멀린 등이 대표팀에 합류하며 12인 로스터 중 11개가 채워지고 나머지 한 개가 남았다.
아이재아 토마스가 물망에 떠올랐다. 그는 당시 매직 존슨과 쌍벽을 이루는 포인트가드로 디트로이트 피스톤즈를 최고의 전성기로 이끈 인물이다. 하지만 거친 몸싸움과 더티한 매너로 마이클과 사이가 안좋아서 그의 합류를 반대하고, 매직과 래리 역시 그의 인성으로 인해 비토를 놓아 그는 결국 합류하지 못했다. 아이재아는 일명 조던 룰의 선봉에 있었다. 조던 룰은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의 척 데일리 감독에 의해 고안된 일종의 마이클 괴롭히기였다. 마이클이 공과 상관없이 어디로 가든 최대 3명이 따라붙어 그가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등 마이클을 막기 위한 10가지 방법은 합법화된 폭력 Legalized Assault이었다. 이로 인해 마이클과 디트로이트 선수들과의 몸싸움이 격렬해졌고 특히 디트로이트 배드 보이즈의 선봉 아이재아는 마이클과 감정적인 대립까지도 나타났다. 사실 척 감독의 조던 룰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 마이클의 시카고 불즈는 1987-88 시즌부터 내리 3년간 디트로이트의 벽을 넘지 못하고 플레이오프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러니 마이클이 아이재아와 함께 뛸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넌센스였다.
결국 최종 한 자리는 마이클에 버금가는 슈팅가드, 포틀랜드 블레이저스의 클라이드 드렉슬러에게로 돌아갔다. 이로써 명실상부 세계 최강을 넘어 역대 최고의 팀인 드림팀이 완성되었다. 실력과 명성을 모두 갖춘 선수들로 구성되어 당시에도 큰 뉴스거리가 되었다. 이들의 몸값만 해도 3천4백만 달러, 우리 돈으로 약 500억 정도이다. 92년도에 이 정도의 돈이면 우리나라 프로 스포츠 모두를 사고도 남을 돈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억대 연봉 선수는 제일교포 선수를 제외하고는 1994년 해태에서 1억 3천만 원을 받은 선동열이었다. 92년도에는 억대 연봉 선수는 노바디. 참고로 이번 파리 올림픽에 출전한 미국 농구 대표팀의 몸값은 5억 2천만 달러, 약 8천억 원이다.
1992년 6월에 한자리에 모이기도 힘든 대 스타들이 LA의 훈련 캠프에 모였다. 당연히 연일 기자들이 구름 떼를 이루며 취재에 여념이 없었다. 멤버 구성만으로도 그들의 연습경기는 거의 올스타 수준이었다. 그리고 다들 자신이 최고라고 자부하는 선수들이어서 대놓고 경쟁심과 자존심을 드러냈다. 이를 컨트롤하는 것이 척 감독의 역할과 미션이었고 연습경기를 철저히 비공개로 진행했다. NCAA 대표 선수들과의 연습경기를 통해 팀워크를 다졌다. 결국 래리와 매직이 공동 주장을 하며 드림팀은 비로소 완성되었다.
드림팀이 처음으로 선보인 것은 바르셀로나 올림픽 예선전을 겸한 제5회 아메리카 대륙선수권 대회였다. 역시나였다. 드림팀은 매 경기 110점, 120점대를 기록하며 상대팀과 40점 내외의 점수차로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이며 전승을 거두며 우승을 하고 올림픽 출전권을 획득했다. 이 경기에 출전한 상대팀은 드림팀을 상대로 잘해보겠다는 생각보다는 그들과 한 코트에 뛰었다는 것 자체가 영광이었고 드림팀 멤버들과 사진을 찍는데 더 열심이었다고 한다.
1992년 7월 24일 바르셀로나에 입성한 드림팀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원팀 스피릿은 깨지지 않았다. 첫 경기 앙골라전부터 그들의 파괴력을 보여준다. 116:48. 마치 대학생이 중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게임과 같았다. 크로아티아전 103:70, 독일전 111:68, 브라질전 127:83, 스페인전 122:81의 압도적인 스코어로 예선전 전승을 거두며 8강에서 푸에르토리코를 115:77, 4강 리투아니아전 127:76으로 상대가 되지 않는 압도적인 실력차로 결승에 오른다. 결승 크로아티아전에서도 역시나 117:85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다. 크로아티아를 결승까지 올려놓은 장본인은 토니 쿠코치였는데, 그는 훗날 시카고 불스의 왕조를 계승하는 역대급 스타가 된다. 하지만 설익은 그의 실력은 드림팀에 상대할 정도는 되지 못했다. 8경기를 펼치는 동안 작전 타임 횟수는 0. 그냥 올스타 전이었다. 상대팀 선수들도 경기보다는 올스타의 경기 감상과 사진 찍기에 열중이었다. 드림팀은 이렇게 한치의 예상을 허용하지 않고 당연한 듯 시상대 가운데 맨 위에 서서 금메달을 수여받았다.
드림팀의 퍼포먼스는 농구 역사상, 아니 스포츠 역사상 최고의 흥행이었고 그렇게 미국이 야심 차게 준비한 바르셀로나 드림팀 프로젝트는 완벽 그 자체였다. 전 세계가 주목한 눈은 바르셀로나에서 NBA로 이어져 90년대에의 NBA는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며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Daddy’s Point of View ============
아빠도 농구의 Big fan이었다. 우리나라에서 한때 야구에 버금가는 인기를 구가했었던 적이 있었고 아빠는 대학 때 농구 동아리에 가입할 정도로 농구를 좋아했었다. 하지만 지금 파리에서 보여주고 있는 드림팀의 면면처럼 과거의 위상과는 거리가 있다. 성공이 있으면 실패가 있고,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기쁠 때가 있으면 슬플 때도 있는 것이 인생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섭리인 것이다. 일희일비하지 말고 새옹지마의 지혜로 세상을 살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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