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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역사 이야기

프라하의 봄 - 체코슬로바키아 민주화 혁명

by 브라보 오스카 2024. 10. 1.
▶ 영화 '서울의 봄'(2023)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88) 포스터. 상황 전개는 다르지만 역사적 전환점에 대한 시대적 배경을 영화의 소재로 삼았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서울의 봄'은 1987년 전두환 정권의 4·13호헌조치에 반발해 국민들이 군부 독재에 저항해서 얻어낸 민주화 결과이다. '서울의 봄'이라는 표현은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의 봄'에 비유한 것이다. 한국에는 서울의 봄이라는 영화가 있듯이 체코에는 1984년 발간한 프라하의 봄을 소재로 한 밀란 쿤데라의 유명한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있다. 이 소설은 아빠가 좋아하는 프랑스 배우 쥘리에트 비노슈가 열연하는 동명 영화로 1988년 탄생했다. 매우 에로틱한 19금 영화이니 나중에 19살이 넘어서 보도록 하자. 지금은 말고..

 

▶ 2015년 7월에 우리 가족이 휴가를 보낸 프라하. 히틀러가 프라하의 아름다움에 반해 공습마저도 금지했다는 얘기가 있다.

우리 가족은 프라하를 방문한 적이 있다. 아빠는 전부 대여섯 번을 간 것 같다. 갈 때마다 느낀 건데 작고 아기자기하며 참 아름다운 도시라고 느낀다. 하지만 프라하에도 슬픈 역사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알면 그냥 아름답다는 느낌만을 들지는 않을 것이다. 1968년 1월부터 8월까지 소련의 간섭을 정면에서 반박하며 친소련 정부를 무너뜨리고 정치적 민주화를 이룬 사건이다. 하지만 결국 반년 만에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 정권도 소련의 탱크 앞에 국가의 지도권을 내려놓아야만 했다. 이후 체코슬로바키아는 다시 독재의 암흑기로 들어가게 되었다.

▶ 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국가의 국경선. 녹색 부분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이다. 2차 세계대전 직전에는 나치 독일에 병합된다.

 

프라하의 봄으로 불리는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화 혁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20세기 초반 동구권 상황을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체코슬로바키아는 1차 세계대전 때까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지배당하고 있었다. 이후 1919년 체코슬로바키아로 독립하면서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수립한다. 2차 세계대전 직전에는 나치에 점령당하고 나치가 패망하자 독립하고 과도정부를 거쳐 46년 국민 총선거를 통해 공산당이 집권한다. 하지만 공산당이 제1당임에도 불구하고 세력이 약해 소련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에 성공하며 공산당 독재가 유지되고 있었다.

 

당시 체코슬로바키아는 공산당 서기장 안토닌 노보트니(Antonín Novotný, 1904-1975)가 실시한 경제 정책들이 실패를 연이므면서 심각한 경기 침체로 이어졌다. 이러한 경기 침체로 인해 국민들은 공산당에 대한 불만 표출로 이어졌다. 이러한 불만은 당 수뇌부에서도 똑같이 발생하여 노보트니에 대한 불만으로 인해 67년 12월 결국 그를 서기장에서 끌어내리게 된다. 그리고 선거를 통해 68년 1월 젊은 개혁파인 알렉산데르 둡체크(Alexander Dubček, 1921-1992)를 새로운 서기장으로 선출하게 된다.

▶ 프라하의 봄 직전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노보트니와 신임 서기장 둡체크.

둡체크는 여러 가지 개혁 정책을 실시하게 된다. 언론 검열을 완화하여 다양한 사회적 의견뿐만 아니라 정부의 비판까지 허용하게 되었다. 또한 침체된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서방과의 교류를 확대하였다. 특히 서독과의 교역 확대, 차관 도입 등을 추진하였다. 또한 둡체크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슬로건 하에 온건한 민주화, 정치적 자유화, 경제적 근대화를 추진하게 된다.

▶ 말 그대로 봄이었다. 그게 다였다. 소련의 탱크는 봄을 밀어내고 지독한 겨울로 다시 돌아가게 만들었다.

하지만 소련에서 이러한 정책이 자칫 공산 세력의 약화로 이어질 것을 우려했다. 서독과 체코슬로바키아가 친해지면 동독이 고립될 것이고 나아가 동유럽의 탈 소련이 될 수도 있을 것이란 우려가 퍼지게 된다. 그래서 소련의 브레즈네프 서기장은 같은 해 8월 20일 바르샤바 조약군인 불가리아, 헝가리, 폴란드와 함께 25만의 군사로 프라하 침공을 명령한다. 서방은 소련의 무력 개입에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미국도 베트남전을 치러야 하는 상황에서 이 사태에 대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소련의 무력 침공에 정부도 지원국도 아닌 국민들이 저항했다. 소련은 이들을 무력으로 진압한다. 사망자가 140명에 이를 정도로 시위는 격렬했으며 대응은 처절했다. 결국 둡체크는 소련에 의해 모스크바로 끌려갔고 당내 강경파인 구스타우 후삭이 서기장으로 올라선다. 그럼으로써 프라하의 봄은 끝나고 만다. 개혁파 숙청, 언론 통제,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정책 폐지 등 개혁 이전으로 돌아갔다. 이로 인해 같은 공산주의 연합이었던 알바니아가 소련의 이러한 조치에 반발해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탈퇴하게 된다.

 

Daddy's Point of View =====================================================================

민주화를 바라는 민중의 열망은 동서를 막론하고 어디서나 강한 것 같다. 지금은 체코의 수도이지만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도인 프라하. 아름다운 관광도시지만 아픈 역사가 있는 도시라는 것을 알면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을 것이다. 바츨라프 광장에서 열심히 포즈 잡고 사진 찍기 바빴으나 60년 전에 소련의 탱크와 총을 든 군인이 밀고 들어와 공포를 조장했던 일이 있었으니 참 아이러니하다. 그나마 동유럽의 벨벳 혁명으로 지금은 자유 도시 자유 국가가 되었지만 8개월 만에 빼앗겨 버린 민주화를 국민들은 소중하게 간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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