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사에서 프랑스혁명만큼 드라마틱한 사건이 있었을까? 수많은 뒷이야기를 남긴 프랑스혁명은 피가 피를 부르는 처절한 혁명이었어. 굳건히 유지되고 있던 프랑스 왕정에서 시민이 들고일어나 체제를 전복하고 공화정으로 만든 유명한 사건, 프랑스혁명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도록 하자.
프랑스혁명은 부패한 귀족세력에 대한 시민의 반란이었다. 그때 당시의 귀족들은 왜 시민의 분노를 샀고 민중은 어떤 상태였는지를 보자.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해는 1789년이다. 하지만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643년부터 1715년까지 재위했던 루이 14세 때의 상황을 알아야 할 것이다. 루이 14세는 프랑스의 왕권을 강화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태양왕(Le Roi Soleil)이라고 알려졌는데, 태양이 유일한 권력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그가 좋아한 발레에서 항상 태양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왕권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라는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며 그 유명한 짐이 곧 국가니라 (L'État, c'est moi)라고 뽕을 심하게 잡수셨다. 그리고 프랑스-네덜란드 전쟁, 아우구스부르크 동맹 전쟁, 스페인 왕위 전쟁 등 크고 작은 전쟁을 벌이고, 베르사유 궁전을 화려하게 짓고 치장하며, 그곳에서 사치와 향락을 벌이면서 왕정과 국가 재정은 바닥나고 있었다. 왕권을 강화하는 데에는 성공하였으나 국가 재정이 파탄 나기 시작하면서 민심은 왕과 귀족에 반대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이후 1774년부터 재위한 루이 16세는 지속적인 재정 낭비로 시민의 불만이 극에 달한다. 재정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영국 견제를 위한 미국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이에 따라 부족한 세수를 평민에게 증세를 함으로써 메꾸려 하였다. 더군다나 그의 부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사치와 향락, 심지어는 온갖 외설적 소문으로 민심은 결국 폭발하게 된다.
당시 프랑스는 3개의 계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계급은 성직자, 2계급은 귀족, 3계급은 평민이었다. 이 중에 가장 불만이 있었던 세력은 당연히 제3계급이었던 평민이었는데, 그들만이 세금을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 역사의 변곡점에는 항상 경제적인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3계급 중에서도 의사, 변호사, 사업가 등 소위 부르주아 계급이 이런 혼란기를 틈타 권력을 잡고자 하였다.
루이 16세는 모자란 세금을 평민의 증세를 통해 만회하려고 하니 국민대표의 동의가 있어야 했으므로 175년간 중단되었던 삼부회를 부활시켰다. 1789년 5월 5일 성직자 290명, 귀족 270명, 평민 585명의 대표가 베르사유궁전에 모여 회의에 참석하였다. 하지만 표결에 있어 성직자와 귀족은 각각 2표, 평민은 1표를 가지게 되었다. 당연히 평민 측은 반발하게 된다. 더 이상 회의가 진전이 없어지자 평민 대표들은 회의장을 빠져나가 6월 17일 본인들이 국민의 대표라는 선언을 하며 '국민의회'를 선포하게 된다. 국민의회의 동의가 없으면 세금 징수를 못한다고 엄포를 놓는다. 당연히 루이 16세와 귀족, 성직자들은 반발을 하며 국민의회를 해산하는 명령을 내리며 회의실을 폐쇄시켜 버린다. 국민의회는 반발을 하며 베르사유궁전의 테니스코트 건물로 이동하여 서약문을 선포한다. 이를 '테니스코트의 서약'이라고 한다. 결국 루이 16세는 군대를 동원하여 테니스코트의 국민의회를 해산시키려 했고 이로 인해 민중의 큰 분노를 사게 되었다. 결국 거리의 성난 민중은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게 된다. 이로써 프랑스는 본격적인 피의 혁명에 돌입하게 된다.
국민의회를 계승한 제헌의회는 혼란과 무질서에 휩싸인 프랑스 전역을 정비하고자 8월 4일 봉건제 폐지를 선언하며 영주와 농노제의 폐지, 토지 및 노예의 개인적 예속 폐지, 소득에 비례한 세금 납부 등을 실현하였다. 또한 8월 26일 인권선언을 한다. 내용은 주권 재민, 사상의 자유, 법앞의 평등, 투표/과세의 평등, 소유권 신성 등이었으며 이후 프랑스 공화국 헌법의 기초가 되었고 유럽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헌법과 정치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루이 16세는 제헌의회의 봉건제 폐지와 인권선언 수용을 거부한다. 그러면서 여전히 베르사유에서는 호화로운 연회가 계속되었으며 특히 대흉작으로 기근이 심해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하고 물가가 폭등하여 "빵을 달라" 외치며 여성들이 왕실의 사치에 분노하여 베르사유 궁으로 뛰쳐 들어가자 앞을 가로막는 왕의 근위병까지 살해하게 된다. 위기를 느낀 루이 16세는 인권선언을 재가한다. 하지만 이것으로 성난 민중을 잠재우기는 부족했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여성들에 의해 파리로 압송당한다.
국민의회가 정국을 주도하며 루이 16세는 상징적인 존재로 전락하며 사실상 입헌군주제의 정치 형태를 이루게 된다. 국민의회는 지속적인 개혁 작업을 진행하였으나 극심한 인플레, 성직자의 반란, 주변국과의 갈등, 영토 분쟁, 망명파 귀족의 부활 움직임 등 불안 요소는 들끓었다. 그러한 와중에 1791년 루이 16세는 마리의 제안으로 그녀의 친정 오스트리아로의 망명을 추진한다. 하지만 뭉그적거리던 루이 16세 때문에 오스트리아를 앞둔 국경 마을 바렌(Varrenes)에서 민중에게 발각이 되고 만다. 그래서 국민의회와 민중은 루이 16세와 마리를 다시 파리로 회송한다. 민중은 국가를 버리고 탈출하려 했던 왕과 그 일가에 대해 매우 실망했으며 왕을 심판대에 세워야 한다는 여론이 커지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혁명에 위기감을 크게 느낀 주변국은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자국의 혁명 지지파를 숙청하고 반 프랑스 동맹을 체결한다. 프랑스는 이에 선전포고를 하나 전쟁에서 패하고 만다. 이 전쟁에서 루이 16세는 프랑스가 져서 다시 왕정으로 복귀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걸었으나 거기까지 미치지는 못하고 오히려 왕비인 마리가 적국과 내통하고 있다는 오해만 사게 된다. 민중은 전쟁 패배의 원인이 왕에게 있다고 하며 책임론을 들고일어난다. 그래서 의회는 패전 수습을 위해 국왕 친위대 해산, 연맹 군 창설 등 법령 개선을 통해 군력을 증강시키려 하였으나 루이 16세의 거부권 발동으로 정지되고 만다. 이는 다시 민중의 분노를 사게 되면서 길거리의 공포를 조장했던 상퀼로트의 출현, 혁명을 옹호하는 국민 방위대의 파리 집결 등 공공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같은 해 7월에 프로이센의 군대가 프랑스 국경을 넘어 파리로 진격했다. 이유는 파리 시민들이 부르봉 왕가를 모욕하고 질서를 흐트러트리고 있으니 질서를 바로잡겠다는 것이다. 전국의 프랑스 국민은 프로이센 군대의 침입뿐만 아니라 왕실이 외국과 내통하고 있다는 사실에 격분해 의용군을 포함하여 파리로 집결한다. 의회마저도 통제력을 상실했고 과격한 상퀼로트들에 의해 파리는 장악되었다. 루이 16세 일가는 머물던 튀일리궁에서 도망쳐 의회로 신병을 의지한다.
혼란 속에 파리에 수감되었던 반혁명주의자들이 탈옥하여 의용군의 가족들을 학살할 것이라는 소문이 돈다. 의용군은 프로이센과의 일전에 앞서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반혁명자들의 대대적인 숙청에 들어간다. 이를 9월학살이라고 하며 이때 살해된 사람은 1만 2천 명 정도 된다고 한다.
프로이센과의 발미전투에서 승리한 의용군은 정국의 주도권을 잡는다. 특히 하층 계급이었던 상퀼로트의 발언권이 커지며 과격한 성향이 강한 자코뱅파를 지지하였다. 당시 자코뱅파는 로베스피에르, 당통, 마라 등이 속해 있었다. 결국 프로이센 군을 국경 밖으로 몰아내고 정국은 자코뱅파를 위시한 국민공회가 국민들의 선거에 의해 설립된다. 이들은 1792년 9월 21일 새로운 헌법을 선포하여 군주제를 완전히 폐지하고 공화국을 선포하게 된다. 프랑스 제1공화국이 출범하게 된다.
"의원 여러분! 여러분은 이미 공화국을 선포했습니다. 공화국! 그런데 루이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나는 이 치명적인 사실을 마지못해 선언하지만, 조국이 살아야 하므로 루이는 죽어야 합니다!"
로베스피에르가 루이 16세의 죄를 심판하는 의회에서 한 연설.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François Marie Isidore de Robespierre, 1758-1794)는 자코뱅파에서 권력을 쥐며 공포정치를 벌인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정치에 입문하기 전 가난한 서민을 대변하는 민중 변호사였으며 사형제도 폐지를 주장하였다고 한다.
로베스피에르는 중앙의 혁명정부 최대 권력자가 된다. 과격파적인 성향에다 국내외의 혼란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공포정치만이 방법이라며 많은 사람들을 단두대에 세웠다. 반혁명자, 왕당파로 의심되면 무조건 즉결심판에 의해 목이 잘려나갔다. 이는 하층 노동자 계급의 지지를 얻었으나 혁명을 통해 이미 기득권을 획득한 부르주아들과 토지 소유 농민들은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에 환멸을 느끼며 더 이상 혁명이 진전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결국 로베스피에르는 1794년 7월 반대파들의 주도한 국민공회에서 체포가 결의되어 그가 애용하던 단두대에서 목이 잘려 나가게 된다. 로베스피에르의 처형 이후 1975년에 현법을 수정하여 총재정부가 수립된다. 하지만 이마저도 반대파들의 반란에 직면하며 혼란은 지속되었다.
이 와중에 영국을 중심으로 한 대불동맹이 결성되어 프랑스는 유럽 군주국의 공격을 받게 된다. 국경 각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프랑스는 연전연패를 거듭하며 반란으로 인한 혼란한 정국과 외세의 침입에 혁명은 위기를 맞게 된다. 이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장군이 등장하여 반란을 수습하고 공격하는 외국 군대를 막아내는 것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이집트 원정을 통해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다.
한편 현재 아이티에 해당하는 카리브해의 프랑스 식민지 생도맹그(Saint Domingue)에서는 식민 본국의 격변을 틈타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 노예들이 현지에도 혁명의 정신을 심어 자유, 평등, 박애를 적용하라는 요구를 하였다. 당시 이 지역은 흑인 노예를 이용하여 설탕, 커피, 코코아, 담배 등을 생산하였으며 유럽 전체 수요의 절반 이상을 공급할 정도로 프랑스의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챙겨주는 곳이었다. 프랑스 중앙 정부와 현지 정부가 이들의 요구를 묵살하자 1791년 8월 22일 부두교의 고위 성직자 투생 루베르튀르가 흑인 노예를 이끌고 봉기를 일으킨다. 약 1개월간의 혈전은 프랑스군 1천 명, 흑인 노예 측 1만 명의 사망자를 낸 끝에 흑인 노예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결국 흑인들은 노예에서 해방된다. 이를 지켜본 영국, 스페인 등은 자기들이 거느린 식민지도 이런 일이 발생할 것을 우려해 대규모 군대를 생도맹그에 파견하여 흑인 노예의 봉기를 진압하려 한다. 하지만 흑인들은 이들의 침략 또한 막아내며 결국 1801년 7월에 헌법을 제정하여 독립을 선언한다. 프랑스 본국에서 제1 통령 나폴레옹이 3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식민지 재탈환을 위해 건너오지만 흑인들은 이들을 몰아내고 1804년 1월 1일 정식으로 흑인 공화국으로 독립한다. 이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미국 다음의 두 번째 독립국이며 노예제를 폐지를 법으로 정한 최초의 아메리카 대륙의 국가가 되었다. 당연하게도 생도맹그의 독립과 노예 해방은 미국과 영국의 식민지 노예 반란, 중남미의 탈식민지화, 노예제 폐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Daddy's Point of View =========================================================================
수많은 뒷이야기와 루머가 끊이지 않고 드라마틱한 순간 순간으로 점철된 프랑스혁명은 새삼스러울 것 없는 역사적 사건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그 이면에 있는 혁명파의 잔인무도한 공포정치와 권력 유지를 위해서는 인명도 우습게 여기는 처사는 많이 부각되지 않은 것 같다. 특히 로베스피에르는 그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단두대를 그리 애용했으나 결국 그도 단두대에서 처형되는 기구한 운명을 맞는 것을 보면 역사는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말해주는 듯하다. 특히 아이티의 노예해방 혁명과 흑인 공화국 독립은 백인 위주의 역사관에 의해 많이 부각되지 않은 것 같다. 지금 아이티라는 나라는 최빈국에 해당할 정도로 세계 무대에서 잊혀진 존재이지만 그들의 독립 과정을 보면 한 편의 영화가 나올 것 같이 버라이어티 할 것 같다. 왠지 그 나라에 가서 투생 루베르튀르의 흔적과 그들의 자유정신을 경험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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