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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역사 이야기

대공황의 극복과 다시 찾아온 미국의 호황

by 브라보 오스카 2024. 7. 22.

미국의 미친 호황에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다.

 

이러한 주식 호황세와 재정 증가세에 대한 낙관은 9월 5일 금융 전문가 로저 뱁슨이 발표한 "대폭락이 다가오고 있다"라는 논설로 큰 충격으로 이어져 다음 날 주식 시장이 3% 정도 폭락하면서 9월 초 폭락세는 "뱁슨 대폭락"이라 부르기도 했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건강한 시장 조정세"라 생각하고 기회라 생각해 주식을 더욱 사들였다. 이는 대폭락으로 가는 전조였다. 런던에서는 영국 최대의 투자자가 사기 및 위조죄로 투옥되면서 런던 증시가 폭락하며 그 영향은 미국에까지 이어져 주식 시장의 불안한 기조가 지속되면서 급등과 급락이 거듭되더니 결국 1929년 10월 24일 목요일 주식시장이 개장하자마자 사람들이 증권회사로 오픈런을 하며 주식을 팔아 재껴 하루동안 무려 11%가 빠졌다. 이날을 두고 검은 목요일 Black Thursday 라고 부른다. 왜 이렇게까지 많이 빠졌는지에 대한 이유는 여러 각도로 분석되고 있으나 명쾌한 원인은 없다. 다만 주식 시장의 불안이 사람들의 심리적 동요로 일어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 1929년 9월 3일 뉴욕 다우지수는 381.17로 최대치를 기록했다. 그리고 10월 24일 검은 목요일 이후 급락을 거듭하며 1933년 7월 8일 41.22를 기록하며 미국은 유래없는 불황을 경험하게 된다. 이는 미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를 강타한다.

 

이로 인해 미국의 주요 은행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기 시작했다. JP모건이 주축이 되어서 은행들이 US스틸 등 주요 우량주들을 사들여 시장 안정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주식시장은 다시 안정되어 갔다. 하지만 주말 동안 목요일의 주식시장 폭락 사태가 신문을 타고 보도되자 사람들의 동요는 더욱 확대되었고 사람들은 손실 폭을 줄이고자 다시 대량의 마진콜이 터져 나왔다. 10월 28일 월요일에는 무려 주가 지수가 무려 13%가 빠졌다. 그다음 날인 29일에도 주식 매도 사태는 지속되어 12%가 빠졌다. 특히 29일 단 하루 동안 미국 정부 예산의 4배에 가까운 140억 달러가 증발해 버렸다. 검은 목요일부터 그다음 주 화요일까지 거의 50% 가까이 빠졌다. 검은 목요일부터 화요일까지 사람들은 패닉에 빠졌고 돈을 빌려 주식을 산 대부분의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건져보려고 주식 시장으로 달려가 패닉 바잉이 그칠 줄 몰랐다. 결국 대세하락장으로 이어진 주가 지수는 대폭락 직전인 1929년 10월 381포인트에서 1932년 7월 7일 41.81포인트를 찍었다. 3년이 채 안된 시점에 89%나 빠진 것이다. 투자자들은 충격적인 시장 붕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뉴스가 끊임없이 나왔다. 백약이 무효한 상황이었다.

 

▶ 1929년부터 33년까지의 미국의 경기 불황은 많은 사람들의 실직과 경제적 고통으로 인해 중산층의 붕괴를 일으켰다.

 

당시 미국에서의 경제학의 주류는 아담 스미스가 주창한 고전경제학이었고 소위 ‘보이지 않는 손’이 경제를 운영해 줄 것으로 믿었다. 당시 대통령인 캐빈 쿨리지 역시 시장의 정부 개입을 최소화하여 자유방임 경제주의를 철저히 지켜 나갔다. 1929년부터 1932년까지의 대공황은 결국 고전경제학의 한계를 보여주는 결과를 낳았다. 즉, 시장에서의 과잉생산, 과잉 설비로 이어진 통제 없는 공급의 과잉이 문제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자 기업에 매기는 세금을 낮추고 각종 규제를 완화하자 기업은 돈을 빌려 생산설비에 투자하고 가뜩이나 효율성이 높아진 상황에서 생산품의 시장 공급은 폭발하여 수요를 감당하지 못했던 것이다. 재고는 쌓이고 물건은 팔리지 않아 자금 회수가 안되어 기업은 도산하고 은행의 여신이 회수되지 않아 은행 역시 파산하고 사람들은 은행에 맡긴 돈을 날려버리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는 농업 분야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미국의 광활한 농토와 농작의 기계화로 생산성이 높아져 1929년 밀의 작황이 전 세계적으로 대풍년이어서 밀의 가격이 대폭락 하여 농민 구호금을 조성해야 할 정도로 농업 또한 나락으로 치달았다.

 

뿐만 아니라 통제력이 약한 자유시장 경제체제하에서 부익부 빈익빈 현상도 심화되었다. 상위 1%의 자본가와 독점 기업은 여전히 부를 독점하고 있었으며 그 비중도 커져갔다. 중산층이 몰락하며 빈민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1929년부터 33년까지 파산한 기업만 4만여 개이고 9천여 은행이 사라져 버렸다. 기업이 사라지니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1929년 실업률은 3.2%였으나 33년에는 무려 25%까지 올라갔다. 즉 노동자 4명 중 한 명은 실업자였다는 것이다. 무시무시한 이야기다. 주식으로 돈을 잃고 직장까지 잃으니 일용직으로 전락하여 일거리를 구하러 매일 길거리로 나가야 했고 무료 급식소를 전전하며 끼니를 때우고 판자촌에서 사람들이 지내는 것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 이 판자촌을 일컬어 후버빌 Hooverville이라 불렀는데 당시 대공황으로 비난받은 당시 대통령 허버트 후버(Herbert Clark Hoover, 1874-1964, 미국의 31대 대통령)를 조롱하는 의미가 담긴 것이었다. 1930년대 미국 전역에 걸쳐 수백 개의 후버빌이 있었으며, 이 슬럼가의 거주자 수는 수십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 대공황으로부터 미국을 구해준 것이 루즈벨트의 뉴딜정책이라고 다들 알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미국을 구출해준 것은 대공황 직후에 터진 사건이 더 크게 작용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Franklin Delano Roosevelt, 1882-1945, 미국의 32대 대통령)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우리가 가장 두려워할 유일한 것은 두려움 그 자체이다 There is nothing to fear, but fear itself라는 명언을 남기며 미국 경제를 되살리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한다. 그리고 뉴딜정책을 추진하면서 케인즈가 주창하는 수정자본주의를 주창하며 정부의 강력한 시장 개입을 추진한다. 중앙 정부는 7개의 주에 걸쳐있는 테네시강 유역을 개발하기 위한 테네시 계곡 개발 공사 Tennessee Valley Authority를 설립하여 댐과 발전소를 건설하고 여기에 필요한 수많은 일자리를 창출한다. 뿐만 아니라 기존 정부의 시장 개입 최소화를 뒤집어 뱅크런을 막기 위해 은행의 임시휴업을 지정할 수 있는 '긴급은행법'을 도입해 은행의 재정 건전성과 시스템을 점검하면서 정부의 돈을 투입해 은행의 회생을 도왔다. 또한 예금보험공사를 설립해 예금자의 자산을 보호해 주고, 증권거래위원회를 설립해 주식시장을 관리감독하여 규제를 높여나갔다. 농업분야에서는 농업조정법을 제정해 농산물의 생산과 공급을 통제하여 농산물의 가격을 안정시키고 농민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하여 농업 안정을 꾀하였다. 그리하여 미국의 경제는 다시 살아나는듯했지만 정부의 막대한 재정 지출로 대공황을 극복하여 어느 정도 경제가 회복되는 듯했지만 정부의 재정적자가 감당하지 못할 수준까지 올라가고 말았다. 결국 정부의 긴축재정이 펼쳐졌고 다시 경기는 냉각되었다. 1937년 다시 살아나던 경기가 침체로 돌아서는 ‘루스벨트 불황’이라는 부작용이 발생하였다.

  

미국은 침몰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이 아메리카 원주민을 밀어내고 식민지 건설에서부터 거대한 영토를 가진 독립국으로 성장하기까지 '미스 콜롬비아'라는 신의 도움과 '명백한 운명 Manifesto Destiny'이라는 믿음의 바탕이 있었듯이 이번에도 거짓말 같은 역사적 사건이 발생하여 미국을 구출해 준다. 바로 1939년 9월 2차 세계대전이 터진 것이다.

 

▶ 1920년대 독일의 경제적 어려움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1,000,000,000 마르크짜리 주화.

 

대공황은 미국에서 만의 상황은 아니었다.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의 경제에 직격탄이 되었다. 미국의 주식 붕괴로 유럽으로 흘러 들어갔던 미국의 투자자금도 회수가 되어 유럽 또한 주식 시장 붕괴와 은행들의 파산으로 유동성 문제가 심각하게 이뤄졌다. 미국의 수요 감소로 유럽의 수출이 급감하였고 미국과 마찬가지의 이유로 실업이 증가하였다. 미국과는 다르게 정치적으로 큰 혼란이 있었다. 사회에 대한 전반적인 불만은 정권에 대한 불신이 증폭되었다. 그중에서도 독일이 특히 심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베르사유 체제하에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던 독일은 경제가 파탄 나고 있었다. 배상금 마련을 위해 중앙정부의 화폐 발행이 무분별하게 이루어져 극심한 화폐 가치의 하락을 피할 수 없었다. 일명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일어나 100조 마르크짜리 지폐가 발행되기도 했다. 불황으로 기업의 일자리는 없어지는 것은 둘째치고 일을 해서 돈을 벌어도 돈의 가치가 없어지니 사람들은 구직을 포기해 버린다. 1932년 독일에서는 실업자가 6백만 명이었고 실업률은 40%에 육박했다. 전쟁의 패배, 식민지 상실, 배상금 지급, 전 세계 경제 대공황, 이런 것들로 독일 사람들의 패배감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패배감은 좌절과 분노로 표출이 되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아돌프 히틀러다. 히틀러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기회에 하기로 하자.

 

▶ 제2차세계대전으로 전세계는 문명이 사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미국은 대공황을 극복하고 다시 한번 경제적 호황을 구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말 미국을 보살피는 신이 있는 것 같다.

 

독일의 게르만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데 성공한 히틀러는 독일을 하나로 뭉치게 만들고 1939년 9월 1일 폴란드를 전격적으로 침공하면서 전쟁을 일으킨다. 미국은 전쟁이 시작되자 중립국을 자처하며 영국과 소련에 무기, 군수물자, 식량 등을 공급하면서 돈을 벌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실업률은 급감하고 경제는 활기가 돌았다. 그렇게 돈만 벌겠다던 미국은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계기로 일본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전쟁에 참여한다. 이에 일본의 동맹국이었던 독일과 이탈리아가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며 미국은 유럽에서까지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전쟁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자 전쟁 관련 산업이 확대되고 군인 양성, 여성과 흑인 노동자 창출 등 경제는 다시 활성화되었다. 1945년 5월에 독일의 항복, 8월에 일본의 항복으로 미국은 승전국이 되면서 세계 경제의 중심으로 떠오르게 된다. 전후 경제의 호황으로 베이이붐세대 Baby Boomer가 출연했고 인구는 크게 늘었다. 이들은 대규모 생산과 소비를 주도하며 미국의 경제 성장을 다시 한번 견인하며 그렇게 미국은 지구상 유일무이의 초강대국으로 되어 간다.

 

 

 

Daddy’s Point of View ===========

 

미국이라는 나라를 보자면 참으로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명백한 운명’이라는 신의 은총이 있는 나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로 인해 더욱 부강해진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면 포기하지 않고 해결하려는 노력이 있었기에 성공의 달콤함을 맛볼 수 있었겠다고 할 수 있지만 결국 기가 막힌 타이밍에 우연한 기회를 타고 살아나는 쌔뽁 넘친 뽀록으로 부자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전쟁이 없었다면 미국이 지금처럼 부강한 나라가 될 수 있었을까? 생각하면 뭐하나 그렇게 이미 되어 버렸는데. 여기서 한 가지만 기억하자! 포기하지 않으면 결국 다시 살아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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