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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역사 이야기

대륙 확장, 남북전쟁, 재건

by 브라보 오스카 2024. 3. 28.

미국의 고통, 그리고 정상...

1. 대륙 확장

미국은 1800년 필라델피아에서 워싱턴DC로 수도로 옮기고 영국과의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영국군을 아메리카 대륙으로부터 밀어낸 다음 이제부터 계속해서 땅 따먹기를 하며 서쪽으로 진격한다. 가로막는 장애물은 없었다. 대영제국의 후손인 미국의 화력 앞에 아메리카 원주민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방대한 영토, 급격한 인구증가, 산업의 발전은 미국을 빠르게 성장시켰다. 독립직후인 1790년만해도 인구는 400만이었으나 1840년, 반세기만에 인구는 1700만으로 네배가 넘게 증가하였다. 그리고 동부를 중심으로 철도와 같은 사회적 인프라가 갖춰지면서 유럽에서 대규모 이민 행렬이 이어졌다. 말그대로 미친 성장이라는 말이 딱 맞았다. 미국은 서쪽으로 서쪽으로 전진했다. 1803년부터 1848년까지를 서부 개척 시대라고 불리며 미국에서 생겨난 기독교의 한 종파인 후기성도들, 이민자들, 골드러시에 몸을 실은 사람들 등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새로운 땅 서부를 개척하며 대거 이주하였다. 이들에게 원주민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이런 미국의 팽창주의는 명백한 운명이라는 사상으로 신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특권이라는 인식이 이들의 사고를 지배했다. 영토는 서부의 끝인 태평양 연안과 남쪽의 멕시코와의 전쟁을 통해 텍사스주, 캘리포니아주, 뉴멕시코주를 할양받았다.

서부로 개척이 이루어고 있던 반면 이미 자리잡은 북동부는 어느정도 산업의 발전을 이룩했다. 북부는 산업화를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성장해 갔는데 농업 위주의 남부와 많은 차이를 보이게 되었다. 문화, 가족 구조, 소비 형태 등 사회 전반적인 차원에서의 차이점이 있었는데, 그중 가장 극명하게 달랐던 점이 노예제의 유무였다. 남부는 노동 집약적인 면화 재배가 주요 산업이었기 때문에 대규모 농장을 유지하기 위한 노예가 반드시 필요했고 북부는 산업화가 이미 자리잡았으므로 노예보다는 임금 노동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미국은 서부 개척 과정에서 미주리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미주리주는 1819년 미국의 한 가운데 있는 지역이다. 미주리주가 미 식민지자들에 의해 개척이 되고 미연방으로 가입을 하게 된다. 하지만 미주리주는 노예제를 합법화하고 그로 인한 산업이 커지고 있었다. 북부를 중심으로 하는 미연방은 노예제를 유지하고 있는 미주리의 가입을 선뜻 반기지 않았다. 하지만 남부는 노예제를 찬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다. 그래서 북부의 11개주, 남주의 11개주가 팽팽하게 의견이 맞섰다. 이런 논쟁이 있을 때 북부 해안의 메인주도 1819년 연방 가입을 신청한다. 이에 연방은 미주리주는 노예제를 인정하고, 메인은 불허하는 타협안을 내놓고 두개의 주를 연방으로 수용한다. 그리고 앞으로 미연방에 가입하는 주는 미주리주를 중심으로 남쪽은 노예제를 인정하고 북쪽은 금지하는 이른바 미주리 타협으로 남부와 북부를 가까스로 틀어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남부에서도 노예제 폐지론이 불거지고 있었으며 1830년대부터 윌리암 로이드 개리슨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조직적인 노예제 반대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당연히 노예로 먹고 살던 농장의 백인 지주들은 강한 반대를 하며 남부에서 심한 갈등이 생기게 되었다. 이런 갈등은 유혈사태까지 발발하여 걷잡을 수 밖에 없이 퍼져 나갔다. 미국의 영토는 태평양까지 도달하면서 신규 가입 주의 노예제를 받아들이느냐 마느냐를 가지고 계속 싸우게 되었다.

노예제에 대한 첨예한 대립은 1852년 발간된 한 베스트셀러 소설을 놓고 격렬한 논쟁과 갈등을 야기시켜 남과 북을 제도적으로 분열시키고 마는데, 그 소설이 바로 그 유명한 해리엇 비처 스토의 톰아저씨 오두막 (Uncle Tom's Cabin) 이다. 노예제에 대한 비판을 담은 이 소설에 대해 북부는 열광했고, 남부는 열폭했다. 이 소설은 출간 당시 단 1년만에 30만부가 팔려 나갔고, 소설뿐만 아니라 연극으로까지 상영되며 전국적인 신드롬을 불러 일으켰다. 연방내에서는 도망노예 송환법, 노예 재판, 신생 주 노예제도 등 노예제 하나만 가지고도 거친 공방이 이어졌다.

그러던 중 1858년 애브러험 링컨이 정치인으로 급부상한다. 링컨은 상원의원 경선에서 노예제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더불어 심지어 흑인의 기본 인권까지 주창하며 국민들 사이에서 빠르게 인지도를 높여 갔다.

여기서 잠깐 링컨의 어린 시절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가보도록 하자. 링컨은 1809년 미국의 켄터키주 호젠빌에서 태어났다. 말그대로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고 자랐다고 한다. 그의 집은 통나무집이었으며 엄마 아빠를 도와 생업을 유지하며 근근히 살아가야 해서 제도권 교육은 전혀 받지 못했다고 한다. 엄마는 그가 아홉살 때 독초를 먹은 소에서 짠 우유를 먹고 34세의 나이로 죽고, 누나도 결혼 후 아이를 낳다가 산욕으로 죽는다. 불행했던 그는 그래도 그를 돌봐준 새엄마와 잘 지냈으며 책읽는 것을 너무 좋아했던 링컨을 적극 지지해 줬다고 한다. 링컨은 여기저기서 듣고 배운 내용을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는 것을 좋아했다. 어려운 정치, 법률 내용도 쉽게 전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역시 사람은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그래서 그는 독학으로 변호사가 되었다. 그러한 능력은 대중들 앞에서 한편 그는 그의 집안이 노예를 두고 있었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며 그의 아내인 매리의 집안이 노예를 거느리고 있었다는 얘기가 있다.

링컨은 상원의원에 출마하여 1860년 공화당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당선된다. 그는 특유의 발빨과 노예제의 비판적인 강한 태도로 북부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으나 남부에서는 그를 압도적으로 반대하는 여론이 높았다. 링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남부주들은 곧바로 연방 탈퇴를 선언한다. 링컨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1860년 12월에 사우스캐롤라이나의 탈퇴를 필두로 미시시피, 플로리다, 앨라배마, 조지아, 루이지애나, 텍사스가 연달아 연방을 탈퇴했다. 이렇게 탈퇴한 7개의 주들은 스스로를 아메리카 연합국이라 부르며 새로운 국가를 창설하기에 이르른다. 그러면서 노예제를 매개로한 갈등은 폭발직전까지 간다.

2. 남북전쟁

한편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 위치한 섬터요새에서 남군과 북군의 교전이 시작되었는데 여기를 사수하던 앤더슨 소령은 노예제를 반대하는 북부파에 속해있었으며 끝까지 이 요새를 지켜 북부에 끝까지 충성하는 모습을 보였다. 링컨은 취임사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연방정부는 섬터요새를 보유하고 점유하고 소유할 것이다

하지만 1861년 남부군은 섬터요새에 포격을 퍼부으며 앤더슨 소령을 공격했다. 앤더슨 소령은 일주일간의 포격을 견뎠으나 결국 후퇴하고 만다. 이로써 남부와 북부의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섬터요새는 결국 남부 소속으로 넘어갔고 이후 버지니아, 아칸소, 테네시, 노스캐롤라이나까지 연방에서 탈퇴하고 남부 연합에 합류하게 된다.

위기를 느낀 미연방, 즉 북부 연합은 남부의 해안과 국경, 그리고 미시시피강을 봉쇄하는 아나콘다 계획을 고안하여 남부의 경제를 무너지게하는 전략을 취하였다. 그래서 남부를 미시시피강을 중심으로 동서로 양분하는 결과까지 획득하며 전세를 유리하게 가져갔다. 봉쇄망으로 경제가 돌아가지 않자 남부는 전쟁을 치룰 보급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를 지켜본 영국이 기회를 놓지지 않고 이 봉쇄를 돌파하기 위한 배를 만들어 준다. 그래서 이름이 봉쇄 돌파선이라고 한다. 그들은 남부군에게 40만정의 소총 등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팔아 먹는다. 그러면서 면화와 담배를 수입해 가는 무역 거래를 하였다.

남부와 북부는 대부분 동부에 전선을 펼치며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다. 전쟁 초반에는 거의 모든 전투가 버지니아에서 벌어졌다. 버지니아에서의 전투는 2년동안 물량전을 치른 남부군의 승리로 돌아갔다. 그러는 동안 1861년 말 북부연합은 버지니아의 서쪽에 연방 탈퇴를 반대했던 주민들을 모아 독립주로 만들어 웨스트 버지니아로 명명한 주가 탄생한다. 당연히 노예제를 반대하는 북부연합에 속했다.

반면 서부쪽의 전선에서는 북부가 우세하였다. 북군은 테네시와 켄터키 그리고 미시시피주에서 남부군을 밀어내며 이 지역을 점령하였다. 결국 미시시피강을 따라 해안까지 점령을 완료한 북부군은 남부를 양분하며 다시 아래서부터 치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남부 최대의 도시 뉴올리언스가 북부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1863년 7월 그 유명한 게티즈버그 전투가 벌어진다. 북부군의 조지 미드와 남부군의 로버트 리가 이끄는 군대가 맞붙었다. 평야에서 벌어진 전투는 먼저 진지를 구축한 북군이 훨씬 유리했고 전체 3분의 1에 해당하는 1만5천명의 돌격대는 1마일의 거리를 달려들어 진격한 남부군은 북부군의 날아오는 포탄과 총탄에 속수무책을 당하며 퇴각하고 만다. 이 전투로 남부의 세력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그러다 결국 1865년 4월에는 링컨 대통령을 대동한 북부군의 그랜트 장군이 남부의 수도까지 진격하며 점령해 버린다. 흑인들은 링컨앞에 무릎을 꿇으며 메시아라고 외쳤는데, 이에 링컨은 당신은 오로지 신 앞에만 무릎을 꿇을 수 있다. 당신이 앞으로 누리게 될 자유에 대해 신에게 감사하시오라고 닭살돋는 멘트로 군중을 매료시켰다.

▶ 전설이 된 연설. 화살표가 링컨의 모습이다. 2분여의 짧은 '게티즈버그 연설'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연설 문구 중의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이 연설문의 원본은 사리지고 없으며 다만 연설을 들은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추정한 것으로 연설문을 전하고 있다.

링컨은 게티즈버그 전투가 끝난 4개월뒤 그곳에서 전장에서 전사한 군인들을 추모하는 자리에서 연설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게티즈버그 연설이다.여든하고도 일곱해 전에 (Four score and seven years ago)로 시작하는 이 연설은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의 주옥같은 명구절을 탄생시켰다.

결국 1865년 남부군의 주요 지도자급 장군이 항복하면서 북부의 승리로 돌아가며 전쟁은 끝난다.

3. 재건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4년 1월 1일 링컨은 노예 해방 선언문을 선포한다. 이에 그치지 않고 링컨은 1865년 4월 흑인에게도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연설을 한다. 그리고 3일 뒤인 1865년 4월 14일 배우 출신이자 남부의 스파이였던 존 윌크스 부스(John Wilkes Booth)가 워싱턴DC의 포드 극장에서 연극을 관람하고 있던 링컨을 암살하게 된다. 부스는 링컨 암살 후 무대위에 올라 영원한 폭군이여의 라틴어인 Sic semper tyrannis, 시크 셈페르 티라니스를 외쳤다. 이 말은 버지니아주의 모토이기도 했으며 남부는 복수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남북전쟁의 종료, 노예 해방, 대통령 링컨의 암살 등 역사적 사건들이 한꺼번에 벌어진 이때 미국은 다시 재건 사업에 들어간다. 남부군에 무기를 팔아먹고 함선 건조까지 도와주었던 영국은 미국에게 그 죄를 물어 1500만달러를 물어주게 되었다. 재건 사업은 미국의 산업력을 급격히 상승시켜 1865년을 기점으로 세계의 열강 반열에 진입하게 된다.

반면에 노예해방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며 대외적으로 민주주의 국가의 완성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지만 여전히 흑인은 해방되었으나 해방되지 못한 상태로 지내고 있었다. 여전히 남부 농장주들 밑에서 착취받는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으며 차별받는 삼류 시민에 머물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인종차별은 남부뿐만 아니라 북부까지 전파되어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이 시기에 KKK와 같은 흑인 암살단이 거리를 활보하여 성장의 그늘을 거치고 있었다.

그러면서 미국은 세계 패권을 거머쥐는 20세기로 넘어들게 된다. 바로 1914년 세계1차대전이 터지면서 말이다.

Daddy's Point of VIew =================

미국은 영국과의 독립전쟁,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 남북전쟁을 거치며 세계 패권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후에도 두차례의 세계 대전, 소련과의 냉전을 모두 승리로 이끌며 결국 패권을 완성한다. 아빠가 생각하기에 미국은 또다른 영국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모든 면에서 영국인이 인프라를 구축하였고 그 속에 유럽의 다른 국가들에서 온 이민자들이 흡수된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차별과 멸시가 심했을까. 게다가 흑인에 대한 반감, 유럽인들과 같이 아메리카 드림을 이루려 온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는 극에 달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고구려인이 귀족과 같은 지배계층으로, 말갈족이 백성으로 구성된 발해와 같은 국가의 구성이라 볼 수 있을 것 같다. 미국은 여전히 자유의 상징이며 최고의 부를 거머진 국가로 어느 나라도 넘볼 수 없는 위치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봤을 때 이러한 전성기는 200년을 넘기지 못한다. 22세기가 되면 분명 미국을 뛰어넘는 국가 또는 민족이 나오게 될 것이다.

미국을 부러워하며 배워야 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미국의 어두운 면을 너희들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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