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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역사 이야기

동학의 창시, 1차 봉기, 2차 봉기

by 브라보 오스카 2024. 4. 11.

1894년은 조선 후기 근대화 시점에 많은 일들이 일어난 해이며 민중은 더없이 피곤한 한 해였을 것이다. 시험에도 많이 나오는 동학 농민 혁명, 청일전쟁, 갑오경장이 모두 이 해에 일어났다. 이번에는 동학 농민 혁명에 대해서 알아보자.

1. 동학의 창시

동학은 1860년 최제우가 경주에서 창시한다. 당시 조선은 개방의 물결을 타고 서양 문물이 한창 유입되었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천주교였다. 천주교라는 말이 없어 사람들은 서양에서 온 것이라 해서 서학이라 불렀다. 그에 반해 최제우는 가르침의 내용은 같은데 조선에서 생겨난 것이라 하여 서학의 상대되는 개념으로 동학이라 불렀다. 최제우는 경주 출신의 몰락한 양반의 자손이었는데 동굴에서 깨달음을 얻고 하늘님의 계시를 받아 세상 사람을 교화하기 시작했다. 후천개벽, 인내천 사상은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이야기하므로 평민은 크게 호응했고 지배 계층 양반은 극구 반대를 하였다. 수적으로 평민이 압도적이었으므로 동학은 순식간에 경상도 전역은 물론 전라도와 충청도에 까지 퍼지게 되었다. 
위기를 느낀 조선 조정은 평등사상을 부르짖는 동학의 교주 최제우를 체포하여 1864년 처형한다. 최제우의 뒤를 이어 최시형이 2대 교주가 되면서 동학은 더욱더 퍼져나가 예전에 교주 1인 체제로는 관리가 되지 못했다. 그래서 포접제라는 것을 두어 마치 점조직과 같이 지역을 중심으로 관리되고 포교를 통해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갔다. 그런 와중에 충청도와 경상도 북쪽은 동학을 정신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종교 그 자체로 여겼고 전라도 지역에서는 외세에 의해 흔들리는 정국을 바로잡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삼았다. 각각 지역적으로 온건한 북접과 강경한 남접으로 나뉘게 된 것이다.

2. 1차 봉기

그러던 와중에 남접 지역인 지금의 전라도 정읍인 고부에서 사건이 발생한다. 1892년 신임군수로 조병갑이 부임한다. 그는 매관매직으로 군수 타이틀을 받은 인물임에 틀림이 없었다. 부임하자마자 온갖 구실을 만들어 세금을 거둬들인다. 불충죄, 불효죄는 물론이거니와 그의 모친이 사망하자 모친의 장례 치를 부조금을 강제로 징수하고 버젓이 저수지가 있는데 농사를 핑계로 또 다른 저수지를 만든다고 돈을 걷고 저수지 공사를 위해 구역 농민을 동원하니 민심의 불만이 극에 달했다. 이에 몰락했지만 글 꾀나 지었던 양반 출신 전창혁이 글로 상소를 하게 된다. 조병갑은 그를 불러 곤장을 때려 죽게 만든다.
민심은 크게 동요되어 그 중심에 전봉준이 나타난다. 전봉준은 곤장맞고 사망한 전창혁의 아들이었다. 그는 남접의 접주 중 하나였다. 그는 사발통문을 만들어 눈 뜨고 볼 수 없는 사태를 뒤집을 계획을 꾸민다. 1894년 3월 천여 명의 농민과 함께 관아를 습격해 점령하고 조병갑은 도망을 가게 된다. 이것이 동학 농민 항쟁의 시발점인 고부민란이다. 
고부 민란을 수습하고자 안핵사 이용태가 파견되지만 그 역시 조병갑과 다르지 않은 악질이라 민란을 일으킨 동학도를 보이는 대로 죽여버린다. 주동자 전봉준은 고부에서 몸을 피해 있다가 조직적인 군사 대응이 필요하다 판단하여 남접의 대접주 김개남과 손화중과 연합하여 3대장 조직하의 창의군을 조직한다. 흰옷을 입은 4천 명이 모인 창의군이 다 모였을 때 산 전체를 덮어 산이 하얗게 보였다 하여 백산봉기라 칭한다. 안핵사 이용태를 몰아내고 세력을 키워간다. 세력이 커져 거의 전라도 전 지역을 장악하게 되어 전라감사 김문현이 직접 관군을 이끌고 창의군을 황토현에서 대적하였으나 전봉준의 유인술에 말려 대패하고 만다. 이에 조정의 중앙에서 홍계훈이 이끄는 700명의 정예군이 파견되어 농민군을 대적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지금의 기관총에 해당하는 개틀링건과 대포를 동원하였으나 농민군은 장태로 이를 극복하여 황룡촌 전투에서 승리하며 전주로 진격한다. 패퇴한 전주감사 김문현은 전주성을 버리고 도주하니 농민군은 전주성에 무혈입성한다.
하지만 여기서 변수가 등장한다. 중앙 조정에서 전라도 지역의 동학 농민의 민란이 심상치 않다 판단하여 당시 조정의 권력을 잡고 있던 민비가 청나라에 SOS를 친다. 청나라는 텐진조약에 의거하여 조선 파병을 일본에 전한다. 일본은 이에 질세라 그들도 바로 군대를 보내는데 전라도와 가까운 서해안 남쪽 지역이 아니라 인천으로 들어온다. 구실은 농민군의 한양 점령을 막아주겠다는 의지라 했으리라.
생각지 않았던 외세의 개입으로 농민군은 조정과 화친을 맺는다. 이른바 전주화약이라 불리는 패정개혁안 12조를 맺고 농민군은 해산한다. 외세를 보내려는 농민군과 조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오히려 경복궁으로 진격해 4시간 만에 점령하고 고종과 민비를 인질로 삼는다. 그리고는 조정과 동학파들과의 조약을 모두 무시하고 친일파들을 앞세워 강제로 개화를 시키는데, 이른바 갑오경장이 일어나게 된다. 동시에 일본군은 아산만에 정박해 있던 청나라 해군을 공격해 청일전쟁이 발발한다.

3. 2차 봉기

정부와 화해만 하면 물러갈 줄 알았던 일본군이 오히려 조정을 자기들 마음대로 뒤흔드니 전봉준은 킹 받는다. 그래서 다시 9월에 2차 거병을 한다. 1차 봉기는 조정이 대상이어서 민란에 가까웠지만 2차는 외세에 대항한 거병이었으므로 의병에 가까웠다. 이 때문에 온건파였던 북쪽세력도 합류하였다. 그래서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의 수제자였던 손병희가 전봉준과 합세하니 그 수가 자그마치 4만이나 되었다. 이에 상응해 흥선대원군도 그의 조카 이준용을 내세워 경기도 남부까지 관군을 보내 겉으로는 동학도를 진압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여 동학군이 충청도를 지나 경기남부까지만 오면 합세해 경복궁으로 쳐들어가 고종을 폐위시키고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동학도가 충청도의 요지 지금의 공주 지역인 우금치에서 일본군을 맞닥뜨린다. 하지만 일본군은 강했다. 최신식 무기로 중무장하였고 게다가 언덕 위에서 자리 잡고 공격하였으므로 동학군은 수적으로 우세했지만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갔다. 11월 약 일주일간 우금치 고개를 넘기 위해 40-50여 차례 일본군의 총탄을 향해 달려갔다. 두려움으로 후퇴를 했을 법했겠지만, 피 흘리며 쓰러져가는 전우를 밟고 계속 앞으로 갔다. 죽은 농민군은 모두 일본군을 향해 쓰러졌으며 도망가면서 뒤를 향해 누운 농민군은 없었다고 한다. 4만의 병력은 3천 남짓 살아남고 결국 퇴각한다. 전봉준과 손병희는 하나라도 살아남아서 동학의 맥을 유지하기 위해 서로 헤어지게 된다. 전봉준은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11월 27일 전주성으로 가기 위해 태인에서 항쟁을 하였으나 패하고 만다. 결국 이 태인전투로 동학의 저항은 끝나게 된다.
전봉준은 몸을 피해 숨어 지냈지만 높은 현상금을 내걸었으며 그의 부하에게 밀고당해 결국 일본군에 잡히게 된다. 잡혀가면서 찍은 사진이 전봉준이 유일하게 남긴 사진이다. 보면 우리들에게 무언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 같지 않은가?

노려보는 눈과 굳게 다문 입은 분명 할 말이 있어 보인다.


전봉준과 마찬가지로 손화중도 잡혀 재판 끝에 교수형을 받아 사형을 당한다. 김개남은 독자적으로 저항하다 결국 참수당하고 만다.
한편 최시형도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사형이 선고됐는데 사형 선고를 내린 장본인이 다름 아닌 탐관오리로 전봉준에게 고부에서 쫓겨난 조병갑이다. 참 아이러니다. 정말 선은 결국 승리하는 것이 맞는지 의문이다.
동학의 접주들이 일본군에 잡혀 처형당하면서 결국 동학 혁명은 실패로 돌아간다. 손병희는 3대 교주로 등극하지만 이때의 동학은 퇴색되었다. 심지어 동학도중에 친일파도 나오게 되어 손병희는 동학을 개혁하여 천도교로 개칭하게 된다.
전봉준은 키가 151cm였다고 한다. 작은 체구였지만 카리스마가 대단하여 녹두장군으로 불렸다. 그가 잡혀 처형당할 때까지 전국에 퍼진 노래가 있었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우리밭에 앉지마라
새야새야 파랑새야
우리논에 앉지마라

전봉준을 회유하기 위해 일본군은 많은 노력을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전봉준은 끝까지 죽음을 택했으며 절대로 역적에 동의하지 않고 오히려 큰 소리로 재판관에게 대들었다고 한다.
남자다…

Daddy’s Point of View =======
전봉준은 동학농민항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 대단한 인물이다. 리더십도 탁월했던 것 같고, 전투적 능력도 매우 뛰어났던 것 같다. 하지만 그는 왜 혁명을 하려 하지 않았을까? 전주화약을 하지 않고 곧바로 한양으로 가면 어땠을까? 과연 무엇 때문에 일본군을 물리치고 기존 왕가를 도와주려 했을까? 우리 민족은 대단한 인물을 많이 배출했지만 다들 생각이 더 혁명적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들에게 기득권 세력들은 무엇을 해줬길래 그들을 도와준다는 것인가? 동학이 혁명으로 성공했다면 우리의 역사는 어찌 되었을까? 지금도 보면 우리나라는 항상 분열되어 있다. 잘 나갈 때는 강력한 지도자가 있었다. 힘이 있으면 국민을 무시하고, 국민이 힘이 생기면 국론은 분열되니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우리가 정말 국민을 위해 일해줄 지도자를 갖는 것은 너무 사치일까? 어제 끝난 선거를 보면서 다시금 생각이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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