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중대한 문제는 연설과 다수결로 해결되지 않으며, 오로지 철과 피로 해결될 뿐이다.
- 1862년 9월 30일, 프로이센 수상으로 임명된 비스마르크의 의회 연설문 중
오늘은 비스마르크와 그가 만들어낸 독일 통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보려 해. 그는 귀족 출신답게 보수적인 정치 성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후일 나치를 연상케 하는 독일 민족의 우수성과 힘에 의한 평화를 주창한 인물이었어.

비스마르크를 이야기하기 전에 당시 독일의 상황에 대해서 간단하게 알아보도록 하자. 독일 지역은 800년 교황 레오 3세가 프랑크인 카롤루스 대제를 로마의 황제로 임명하면서 로마의 칭호가 등장해. 이탈리아반도에서 시작된 서로마 제국이 476년 망한 후 300년이 지난 후에야 로마라는 칭호가 다시 등장하게 된 거야. 그러면서 1157년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Friedrich I Barbarossa, 1122-1190)가 신성(holy)을 붙여 신성 제국으로 명명하고 1254년 처음으로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칭호가 나오게 되었어. 당시 신성로마제국은 나름대로의 역사적 의의를 갖는 정치 단위였어. 하지만 18세기 말이 지나서는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존재로 여겨지면서 신성로마제국은 거의 쓰이지 않았어. 오죽하면 프랑스의 계몽주의 대표적 철학자 볼테르는 다음과 같이 비아냥 거렸지.
스스로 신성로마제국으로 칭하였고 아직도 칭하고 있는 이 나라는 딱히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며 제국도 아니다.
- 볼테르(1694-1778, Voltaire는 필명이고 본명은 François-Marie Arouet)
여러 영주들로 구성되어 느슨하게 뭉쳐졌던 이 제국은 1806년 나폴레옹에게 패배하면서 연방은 공식적으로 해체되지. 나폴레옹이 몰고 온 유럽의 사상적 변화는 가히 대단해서 독일 지역에서도 독일어를 쓰는 민족적 개념이 생기기 시작했고 통일을 이루려는 열망이 게르만 민족에게도 퍼지기 시작했지. 20세기 독일의 역사학자 토마스 니퍼다이(Thomas Nipperdey, 1927-1992)는 자신의 독일사(Deutsche Geschichte) 3부작 첫 문장에서 창세기의 구절을 인용하며 "Am Anfang war Napoleon (태초에 나폴레옹이 있었다)"이라고 말하기도 했어. 하지만 이후에도 통일된 국가를 갖기에는 아직 역부족이었어. 민족 개념은 생겨났지만 게르만 민족의 국가가 탄생한다는 것은 주변국에도 매우 위험스러운 일이며 각 지방의 왕이나 영주들은 통일이 되면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특혜와 권리가 없어지거나 줄어들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야. 그래서 나폴레옹 이후의 유럽 체제를 논의한 1814년 빈 회의에서 독일 지역은 41개의 정치 단위로 구성된 독일 연방이 결성이 돼. 이러한 혼란스러운 독일 상황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비스마르크가 이를 정리하게 되지.

비스마르크는 1815년 독일 쇤하우젠(Schönhausen)이라는 지방의 융커(Junker) 집 안에서 태어났어. 융커는 지방의 토지와 중간급의 관직을 보유한 하위 지방 귀족이라고 보면 될 거야. 그는 전혀 다른 성격의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자라났다고 해. 그의 아버지는 지방에서 농장을 소유한 농장주 귀족으로 무난하고 조용 히 살면서 그의 자식도 그와 같은 삶을 살길 바랬어. 하지만 대치동 스카이캐슬 어머니는 지방에서 벗어나 더 큰 세상에서 살게 하고자 아이들의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지. 예나 지금이나 아이들의 교육은 엄마의 주도로 이루어지게 되는가 봐. 결국 엄마의 뜻에 따라 스스로 교도소라 칭한 플라만 보딩 스쿨에 입학해서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해. 그는 역사를 제외하고는 모든 분야에서 탁월한 성적을 보였는데, 특히 지리와 언어, 통계학에서 발군의 능력을 과시했다고 해. 그리스어, 라틴어, 스페인어, 프랑스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어, 향후 국제정세를 파악하는 중요한 기본 재능이 되었다고 볼 수 있지. 나중에 하노버 왕국의 괴팅겐 대학교의 법학과에 입학을 해. 스카이캐슬 맘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비스마르크는 방탕한 생활로 삐뚤어지면서 심심하면 자기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에 게 결투를 신청했는데, 25번이나 결투를 했다고 해. 학교에서도 골치 아픈 이 문제의 청년을 내부의 감옥에 가두기까지 했다고 하지. 결국 아빠한테 뒤지게 혼나고 나서 베를린 대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지. 그는 정신을 차리고 열심히 공부했는데, 전공을 살려 법관 시보에 합격해 베를린과 아헨에서 일을 했으나 어려서부터 외국어에 능통했었던지라 외교관을 꿈꾸게 되지. 그는 군대 제대 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농장에서 농장주로 일을 하면서 여행과 독서에 열중했다고 해. 하지만 그에게 시골 생활은 답답하기 그지없었지. 그의 자유분방한 성격과 대학 친구들, 융커 집 안의 내력은 그를 극렬한 보수주의적 정치 성향을 갖게 만들었어. 그는 자유주의, 민족주의에 대해 철저히 반대 노선을 가고 있었던 중에, 작센 지방의 통합지방의회 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됐어. 하지만 당시 온건적 자유주의자들이 대세였던 통합지방의회에서 추진한 철도 건설 공채 발행에 반대하면서 그의 정치 생활은 2 개월 만에 끝나고 말아. 그때가 1847년이었는데, 이때 독일 지역의 상황은 매우 급격하게 변하는 중이었어.

1848년 3월 13일 프로이센의 수도였던 베를린에서 프랑스의 2월 혁명에 영향을 받아 자유주의를 추종하는 부르주아들의 민중봉기가 일어나. 당시 프로이센의 국왕이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꼬리를 내리고 자유주의적 권한을 보장하는 헌법 제정을 승인해. 이에 열받은 비스마르크는 자기 농장에서 일하는 소작농들을 이끌고 베를린으로 무력시위를 하러 갔지만 또 다른 주변의 보수주의 인사들의 만류로 결국 뜻을 버리고 다시 그의 고향인 쇤하우젠으로 돌아가지. 이 당시 대세는 자유주의였던 것 같아.

한편, 3월 혁명 이후 대세를 직감한 프로이센의 자유주의자들은 500명의 대표단으로 구성된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를 소집해. 그러면서 그들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에게 독일 연방을 입헌군주제로 체제를 정비하고 연방을 대표하는 프로이센의 국왕으로 추대했지만 그는 “지들이 뭔데?”라며 국민이 씌워주는 왕관은 쓰지 않겠다며 거부했어. 힘이 아닌 지식과 양심에 입각했던 대표들이 제공하는 황제의 관은 '돼지의 머리에나 어울린다'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고 해. 사실 이때 자유주의자들과 함께 대두되었던 민족주의자들은 독일 민족의 통일을 주창하였는데 오스트리아를 넣고 안 넣고에 따라 대독일주의와 소독일주의로 나뉘게 되었어.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독일이 민중의 힘에 의해 통일되는 것은 어쨌든 반대했고 그렇게 통일이 되었을 때 자신의 영향력이 줄어들 것은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야.
지주 출신의 열혈 극보수 비스마르크는 1849년 프로이센의 통합지방의회의 의원이 되었어. 그는 자유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이 외치던 독일의 통일은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프로이센의 위상이 꺾이는 통일은 반대했고 당시 연방에서 짱먹고 있던 대국 오스트리아에게 밀리면 안 된다고 주장했어. 그러던 중에 비스마르크에게 뜬금포가 터지게 되었어. 갑자기 1851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그를 프랑크푸르트의 연방의회 대사를 하라는 거야. 그가 꿈꿔왔던 외교관의 일을 드디어 할 수 있게 된 거지. 당시에 이러한 임명은 대단히 파격적이었는데, 비스마르크는 외교적 경험이 전무했고 정치적 위상도 대사급은 아니었지만 프로이센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적임자로 주변에서 적극적으로 추천했기 때문이지. 그는 역시나 프랑크 푸르트 대사를 하면서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와 동등한 권리와 지위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오스트리아와 자주 부딪혔다고 해.
연방 의회에서 유명한 일화가 있어. 당시 오스트리아가 연방 의회에서 짱먹는 의장국이자 실질적인 맹주였었는데, 그래서 오스트리아 대표만이 담배를 피울 수 있는 암묵적 규칙이 있었다고 해. 그런데 이를 본 비스마르크는 그 자리에서 의장에게 담배에 불을 청하며 담배를 피웠다고 해. 당시에 담배 한 개비였지만 모두를 놀래키는 파격적인 행동이었고 프로이센 이 더 이상 오스트리아의 아래가 아니라는 것을 강하게 보여준 것이었어. 그리고 1859년 다시 러시아 주재 프로이센 공사로 임명이 되지. 그는 러시아에서 프로이센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는 러시아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고 러시아 제국의 짜르 알렉산드르 2세와 두터운 친분을 갖게 되면서 프로이센과 러시아의 관계가 매우 우호적이 되었어. 그리고 다시 그는 1862년 프랑스로 옮기는데 거기서는 프랑스의 전제군주 나폴레옹 3세의 정책을 유심히 살펴보면서 자신의 정책에도 활용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야. 프랑스에서 샹송을 들으며 파리의 낭만에 젖어들려 하던 와중에 그의 조국 프로이센에서 급전을 받게 되었어.
Daddy’s Point of View ============
독일이 통일되는 과정은 매우 순탄치 않았어. 프랑스, 러시아 같은 강대국이 포진하고 있을 때 같은 독일어를 쓰는 게르만 민족을 표방하며 통일을 하고 싶었지만 주변국들의 이해와 내부 권력의 분산은 통일을 바라는 민중들의 뜻과 같이 가기 어려웠지. 그러는 와중에 독일 불세출의 영웅 비스마르크가 나타나서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하는 통일 독일을 그려가게 되지. 그는 별명 그대로 철혈재상에 어울리게 엄청난 추진력과 결단력, 상황 판단력이 아주 뛰어났던 것 같아. 물론 지방 귀족 출신이기에 남들과 다른 길을 갈 수 있었지. 공부도 잘했나봐. 그는 외교관을 꿈꿨는데 역시 정치의 꽃은 외교인거 같아. 외교를 잘해야 국가를 통치하는데 장애가 없는 것 같아.
너희들도 어려서긴 했지만 해외에서 살았던 경험이 너희들의 성장에 바탕이 되었으면 해. 그래서 비스마르크 정도는 아니더라도 그만큼의 세계 정세를 볼 수 있는 눈이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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