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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역사 이야기

한무제와 흉노족

by 브라보 오스카 2024. 5. 1.

오늘은 한무제, 한나라의 황제의 흉노족 토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해.
 

▶ 한무제(漢武帝, BC156-BC87, 재위 BC141-BC87년). 그는 유학을 바탕으로 국가를 다스렸으며, 해외 원정을 통해 흉노를 크게 무찌르고, 남월, 위만조선 을 멸망시켜 한사군을 설치했으며, 한족 역사상 두 번째로 넓은 영토를 확보해 전한의 전성기를 열었다. 그는 진 시황제, 당 태종, 영락제, 강희제 와 더불어 중국 의 가장 위대한 황제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한무제는 고대 중국의 황금기를 이끈 한나라 제7대 황제야. BC141년에 16세의 나이로 황제에 즉위했어. 그는 사실 아버지 경제의 열한번째 아들다가, 심지어 후궁의 소생이었지. 따라서 왕권 계승 서열에서 한참 밀린 수 밖에없는 인물이었어. 하지만 그의 어머니 효경황후의 뛰어난 모략 덕분에 그는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어. 한무제는 22세때부터 수완을 보이기 시작하지. 화폐개혁을 실시해 지하경제를 양지로 이끌었고, 소금과 철, 술의 전매제도를 통해 국가 재정을 튼튼히 했어. 이때 확립된 염철 전매제도는 이후로도 중국 세수의 근간이 된단다.
 

▶ 중국 한족 중심의 역사관. 중화민족을 제외하곤 모두 사람이 아닌 오랑캐로 취급했다.

 
한무제는 중국 역사상 가장 사랑받는 황제 중 한명이야. 하지만 평가도 상당히 엇갈리는 인물이기도 해. 바로 한 무제의 흉노정벌과 그 과정에서 한무제가 보여준 인사정책 때문이지. 흉노는 중국에서 북방 유목 민족을 통틀어 폄하하는 의미로 쓰였어. 시베리아 일대의 몽골, 서쪽 중앙아시아 일대의 민족들을 모두 흉노라 불렀어. 중국은 자신들이 사는 곳을 이른바 ‘중원’이라고 했고 이 중원을 중심으로 서융, 동이, 남만, 북적 이렇게 오랑캐로 하대하는 말을 만들어 불렀어. 그중 북쪽에 해당하는 흉노족은 전형적인 유목 민족 기병대로 명성이 자자했어. 유목민의 생활터전은 대단히 척박했어. 그래서 곡식에서부터 생필품의 보급을 모두 약탈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어. 그렇기 때문에 중국 본토에 왕조가 수립될 때마다 흉노족을 토벌하려는 시도가 빈번했었지.
 

▶ 흉노족은 중국 중원의 북쪽에서 터전을 잡고 지내던 민족이다.  흉노(匈奴)는 오랑캐 흉(匈)과 노비 노(奴)를 합친 말이다. 이름 그대로 보면 오랑캐+노비로 풀이된다. 이것은 흉노를 두려워하고, 이미지를 깎아 내리려는 중국인들의 입장에서 만든 표현이다. 흉노의 어원에 대해 정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다. 흉노 스스로가 자신들을 Hun[흉]으로 불렀으며, 중국인들이 흉(匈)이라는 글자를 붙였다는 것이 유력하다. Hun은 흉노의 언어인 퉁구스어로는 그냥 사람이라는 뜻이다. 중국인들은 여기에 멸시하는 의미인 노(奴)까지 붙인 것이다. 훈족이 대단한게  직접적으로 로마의 멸망과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중국의 대대적인 흉노족 토벌로 흉노족은 서쪽으로 이동할 수 밖에 없었고 그러는 와중에 서아시아를 거쳐 유럽에까지 이동하였다. 유럽에서 만난 게르만족은 흉노족을 만났는데, 게르만족은 흉노족을 훈족이라 불렀고 그들의 전투 능력에 로마로 밀려난 게르만족은 결국 476년 서로마를 멸망시킨다. 여러 논란이 있지만 지금의 헝거리는 유럽의 다른 민족들과 생김새, 언어, 종교도 달라 훈족 즉 흉노족의 후예라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불교의 영향을 받고 세워진 도시이다.

 
흉노족은 유목민이었기 때문에 단합이 매우 힘들었어. 부족 개념이었기 때문에 민족 의식은 거의 없었지. 그래서 커다란 힘을 보일 수가 없었어. 그들은 어디에 억메이지 않는 이른바 자유로운 영혼이었던거지. 때문에 중국의 왕조는 항상 유목민족에 대한 분열 정책을 고수해 왔어. 사실 중원의 통일왕조에서 가장 악목같이 생각하는 일은 바로 이 유목민족에서 걸출한 리더가 나오는 것이었지.
 

▶ 묵돌선우(또는 목특선우, BC234-174, 재위 BC209-BC274), 흉노족 최고의 지도자. 선우는 그들 말로 왕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드디어 흉노족에게 강력한 리더가 나온다. 그는 ‘묵돌선우' 또는 '묵특선우’라는 명칭의 왕위에 올라 통합하기 힘든 유목민족 세력을 조직화하는데 성공하게 돼. 그는 유목민족으로서 자신들의 강점을 잘 알고 있었어. 단기필마의 기병 위주로 편성된 흉노의 군대는 스피드를 이용한 압도적인 파괴력을 보유하고 있었지. 한나라 기병 100명을 흉노기병 3명이 이긴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야전에서는 흉노족을 당해낼 수가 없었던거야. 사실 한나라 건국 이후 한 고조 유방이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 흉노 토벌에 나섰지만, 오히려 흉노족의 반격에 직면해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기도 했어. 유방의 굴욕적인 화친 이후 제위에 오르는 선우마다 한나라를 침략하기 시작했고, 한나라는 그때마다 돈으로 평화를 사는 어리석은 짓을 반복하게 되었어.
 

▶ 위자부 또는 무사황후 위씨 (武思皇后 衛氏, ?-BC91) 하녀의 딸이라는 미천한 출신에서 한무제의 두번째 황후가 되어 38년간이나 권좌에 있었던 대단한 여인. 그의 오빠 위청은 흉노족 토벌의 대단한 공을 세워 득세하게 된다.

 
한무제는 이 흉노를 정벌하기로 결심해. 1차 흉노정벌의 영웅은 ‘위청’과 ‘곽거병’이었어. 특히 위청은 원래 양치기 출신이었다고 해. 그의 누이동생인 위자부는 한무제의 누나 평양공주의 노비였어. 누나가 데리고 다니는 계집종의 빼어난 미모에 녹아난 한무제는 그녀를 덜컥 후궁으로 들여. 그리고 마침내 위자부는 황후의 자리까지 오르며 인생 역전에 성공하게 되지. 그녀는 자신의 오라비를 황제에게 천거했고, 한무제는 위청을 장군에 임명하고 흉노정벌을 맡겼어. 위청은 비천한 노비 출신이었지만 말을 잘타고 활쏘기에 매우 능했다고 해. 인망도 두터워서 병사들은 모두 그의 지휘를 받길 원했지. 한마디로 장군의 자질이 있었다는 이야기지. 그리고 기병을 이끌고 적진을 휘젖고 다닌 곽거병은 기병전투에 천부적인 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고 해. 위청과 곽거병, 이 둘의 활약으로 흉노는 막대한 타격을 입고 쫓겨나게 되지. 유목민족은 통합된 부족이 아니기 때문에 신나게 공격할 때는 비교적 단합이 잘 되지만, 일이 여의치 않다 싶을 때는 바로 분열하는 약점이 있었다고 해. 이로서 한문제의 흉노 정벌은 대성공을 거두었어.
 
하지만 흉노는 전열을 가다듬고 BC91-90년 사이에 다시 중원을 노리지. 이에 한무제는 2차 흉노 정벌을 단행했어. 여기서 묘한 일이 일어나. 2차 원정에서도 여자가 등장해. 위부인이 나이가 들자 한무제는 부인에게 흥미를 잃었고 때맞춰 절세 미녀인 이씨가 나타나. 이씨의 미모에 정신을 못차린 한무제는 이씨를 후궁으로 앉히고 위부인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이씨의 오빠 '이광리'를 장군에 임명해. 그리고 그는 2차 흉노 정벌의 총사령관이 되지. 그는 한나라 최정예 기병을 이끌고 출정을 해. 그런데 당시 젊은 장군이었던 '이릉'도 한무제에게 병력을 나누어달라 청했어. 한무제는 마지못해 5천의 병력을 내어줬다만, 이릉 때문에 기분이 몹시 상했어. 이광리를 밀어주는데 웬 새파란 놈이 방해를 했기 때문이지. 그런데 묘하게도 이광리는 연속해서 전투에서 대패한 반면, 이릉은 5천의 보병으로 대활약을 하게되지. 하지만 중과부적으로 결국 흉노에게 항복하고 말지. 대노한 한무제는 그 자리에서 이릉에게 사형을 선언해. 그런데 여기서 태사령 사마천이 입바른 소리를 하지.
 

“이릉은 죄가 없습니다. 임전무퇴의 정신은 오히려 상을 받아 마땅합니다.”

 - 사마천 –

 
한무제의 노려움을 산 사마천은 역시 곧바로 체포되었어. 결국 거세형에 처해지고 말아. 사마천은 이 수모를 겪고도 역사에 길이 남을 저서 <<사기>>를 남겨. 결국 이광리가 지휘하던 한나라 군대는 흉노에게 간신히 승리하긴 했지만, 막대한 손실을 입은 상처뿐인 영광이었어. 그리고 이광리는 얼마 후에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놀랍게도 흉노에 투항해.
 
Daddy's Point of View =====================================
 
이러한 한무제의 인사 정책에는 어떤 문제가 있었을까? 솔직히 위청과 곽거병의 케이스는 로또 당첨에 가까웠거라 볼 수 있어. 운 좋게도 능력있는 인물이었으니까. 한무제는 이광리를 기용하면서 그 어떤 능력도 검증하지 않았어. 그저 여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중요한 인사를 어처구니 없이 단행한거지. 그리고 그 결과는 참담했어. 더욱이 바른말을 하는 이릉과 사마천에게는 지나친 형벌을 내린거지. 한무제는 그 어떤 반대 의견도 허용치 않았던거야. 그는 심지어 자식들에게도조차 역모의 누명을 씌워 손자들까지 처단하는 비정함을 보였어. 원칙과 검증이 없는 기분파 인사정책과 지나치게 가혹한 처벌은 심한 부작용을 부르지. 그리고 그 부작용의 결과는 결국 국민들이 감당해야 하는거지. 바로 이점이 조직의 철저한 인사 정책과 리더의 사람보는 안목이 중요한 이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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