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 안창호는 조선이 외세에 한창 뜯김을 당하고 있을 때인 1878년 평안남도 강서에서 태어났다. 그는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아버지를 어린 나이에 여의고 할아버지 손에서 자랐다. 그는 어려서부터 조숙해서 서당에서 사귄 연상의 친구 필대은과 시국에 관해 토론하고 다녔다고 한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평양이 파괴되자 동학농민운동의 자주적 활동을 보고 구국의 대열에 합류하고자 경성부로 떠나게 되었는데 그때 그의 나이 16세였다.
그는 1902년 이혜련과 결혼 후 곧바로 미국으로 간다. 미국으로 가는 도중에 망망대해 가운데 우뚝 솟은 하와이 섬을 보고 매료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호를 도산(島山)으로 지었다. 미국에 가족들을 남겨두고 안창호는 구국 활동으로 상해, 동경, 경성, 평양 등지를 돌아다녔다. 그때부터 안창호의 교육자 인생이 시작되었다.
그가 독립운동 과정에서 세운 인재 양성 기관과 학교만 합해도 무려 여섯 개이다. 이외에도 그가 조직하거나 관련되어 있는 단체는 열다섯 개에 이른다. 때문에 우리는 그를 독립운동가이면서 동시에 교육자라고 이야기한다.
미국에서 조선으로 돌아온 안창호는 1907년 신민회를 세운다. 신민회의 목표는 국권을 회복하여 자유 독립국을 세우고 실력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사업을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재원이 필요했는데, 각 지역의 부호들을 설득해 학교 설립에 나서게 하였고 회사를 설립해 운영하도록 장려했다. 그리고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청년들을 모아 양성하고 주요 지역으로의 파견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안창호는 청년 양성기관으로 1908년 9월 평양에 '대성학교'를 설립하게 된다. 대성학교의 교장은 윤치호가 맡았으나 모든 학교 운영은 교장 대리인 안창호가 맡아 책임졌다.
학교에서는 매일 아침 애국가를 부르고 애국에 관한 훈화를 했다. 국어, 한문, 작문, 역사, 지리 외에도 군사훈련에 해당하는 체조를 중시하였다. 개교 이듬해에는 학생이 400명으로 늘었고 학교의 틀도 잡혀갔다. 대성학교에 대한 지역사회의 관심은 엄청나서 학교의 봄과 가을 운동회에는 4~5천명의 시민들이 참관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성학교 사업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는 것과는 달리 안창호는 1909년 10월 안중근 의거 사건에 연관된 인물로 구속된다. 그러는 바람에 그의 대성학교 생활도 사실상 되었다.
대성학교 설립은 국권회복과 핵심 인재들을 양성하는 작업의 일부였으나 1년에 지도하는 학생 수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안창호는 전국의 학생들 중에서 나라 구하는 것에 뜻을 두고 있는 청년들을 찾아내 따로 훈련하는 것을 계획하게 된다. 마침 일본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던 최남선이 학교에서 조선 국왕에 대한 굴욕적인 상황을 토의 안건으로 삼자 이에 반발하고 귀국했기에 그를 중심으로 학생 조직을 추진하기로 한다. 그렇게 국내 최초의 청년 운동단체 ‘청년학우회’가 1909년 11월 탄생한다.
조직 과정은 엄격했다. 특히 복잡한 문답 과정을 특징으로 했다. 무실, 역행, 자강, 충실, 근면, 정체, 용감과 같은 7대 정신을 강령으로 하고 지덕체( 智德體)를 육성해 실력 연마하는 것을 기초로 삼았다. 청년학우회는 전국적인 조직으로 만 17세 이상의 중학교 학력을 갖고 품행이 단정한 청년들을 엄선해 훈련했다.
그러나 1910년 한일병합으로 인한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일본에 의해 11월 활동을 중단해야만 했다. 안창호가 인재 양성을 위해 기획했던 단체들은 나라가 새로운 국문을 맞이하면서 하나둘 사라지게 되었다.
안중근의 의거 사건으로 인해 대성학교에 대한 일본의 감시는 더욱 강화되었고 1909년 10월 31일 일본 헌병들이 학교를 포위하고 안창호를 체포했다. 안중근이 순국한 뒤, 풀려난 안창호는 망명길에 오르게 되는데, 그러나 이때의 망명은 일본의 탄압에서 도망치는 것이 아닌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만들어 장기전에 대비할 계획에서 비롯되었다.
안창호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단순한 독립운동을 넘어서 일본과의 장기적인 싸움을 해나갈 수 있는 더욱 근본적인 문제를 고민하게 된다. 그는 고민 끝에 해답을 내놓았는데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유학 중인 청년 학생들을 중심으로 1913년 5월 민족 운동단체 '흥사단'을 조직하였다. 안창호는 흥사단을 상징하는 기러기, 깃발, 마크, 임단가 등을 직접 제작하여 준비하고 만전을 가했다. 이후 흥사단은 3·1운동에 기여했으며 나라를 위한 인재들을 많이 배출해 냈다. 백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흥사단은 그 정신을 이어받아 현재까지도 비영리 시민사회단체로 활동하고 있다.
안창호. 그는 독립을 위해 맞서 싸우는 것만큼이나 멀리 보고 제대로 준비하는 자세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리고 그 바탕은 젊고 능력 있는 인재를 양성하는 일이었다.
낙망은 청년의 죽음이오.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
그가 동포에게 남긴 이 한마디는 인재 양성을 위해 위험을 무릅썼던 그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다.
Daddy’s Point of View ==============
안창호는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대한민국의 독립운동 역사에 큰 역할을 한 사람이다. 직접적으로 총과 칼을 들어 일본에 대응한 것이 아니라 공부와 훈련으로 일본에 맞설 민족적 역량을 키우려 했다. 즉, 그는 독립운동가 이전에 교육자였던 것이다. 일본을 상대해서 이기려면 무력적 힘뿐만 아니라 지적 능력도 있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의 정신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나라에 우리의 주권을 갖고 국가라는 형태의 시스템에서 민주적으로 살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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