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리더십 #장영실 #황희 #집현 # 재행연소자 # 사가독서제
조선의 네 번째 왕 세종은 조선의 최전성기를 구가한 최고 성군으로 추앙받고 있다. 세종은 개인적으로도 매우 뛰어난 역량을 보유하고 있으면서 ‘함께하는’ 정치 리더십까지 발휘했던 인물이다. 필요한 경우에는 백성들에게까지 의견을 묻고 적재적소의 인재를 등용하고 활용하는 역량을 발휘했다. 1420년에는 아예 체계적인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시스템인 집현전을 설치했다. 인재를 최대한 양성하고 활용을 해서 설정한 목표들을 완성해 나갔던 세종의 모습은 현재의 정치 체계뿐만 아니라 기업의 경영에도 많은 귀감을 준다. 그의 인재 활용의 노하우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세종 시대에 과학적 발전을 이룬 중심에 장영실이 있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아는 사실이다. 장영실은 태종때 처음 왕실에서 일을 하였다. 하지만 장영실의 능력을 정확히 파악하고 최고의 과학자로 키운 인물은 세종이다. 장영실은 사실 관직에 진출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원나라 소주·항주 사람으로 중국에서 귀화한 인물이고 어머니는 관청 기생 출신이었다. 또한 본인도 동래현의 관노였었다. 미천한 출신 성분은 신분제 시대에서 관직에 진출할 때 큰 걸림돌이 아닐 수 없다. 그만큼 파격적이었던 것이다. 세종은 그의 신분이나 출신은 보지 않고 철저히 그의 능력만을 보고 그를 관직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당연히 당시 신하들의 반발은 심했었다. 세종도 물러서지 않고 인재 등용할 때는 능력 본위로 해야 한다고 설득해 나갔고 결국 세종의 기대에 장영실이 부응을 하게 된다. 장영실은 세종의 명을 받아 국가의 과학 프로젝트를 대부분 수행하였다. 천무관측 기구인 간의(簡儀)라던가, 해시계인 천평일구(天平日晷),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를 발명하였다.
만약 장영실이 아니었다면 이런 성과를 내지 못하였을 것이다.
세종은 이렇듯 장영실에 대해 무한 신뢰를 보여 주었다. 결국 장영실의 발탁으로 조선은 세계적 수준의 과학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반을 갖게 된다.
황희의 정승 발탁도 드라마틱하다. 그는 맞아들인 양녕대군을 폐위하고 세번째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는 것은 잘못된 선례가 될 수 있다며 태종에게 세종의 왕위 등극을 격하게 반대했었다. 그래서 황희는 유배를 떠나게 된다. 그리고 세종이 왕위에 올랐다라는 소식을 듣고는 황희는 이제 자신의 정치생명이 쫑났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종은 그를 영의정에 등용하며 최고의 재상이 되는 발판을 제공했다. 황희뿐만 아니라 유관, 허조, 맹사성과 같은 능력 있는 재상을 대거 발탁하여 국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하였다.
그래서 세종의 시대에는 각 분야별로 뛰어난 인재들이 많이 양성이 되었는데 그것은 적재적소에 인재를 등용하는 세종의 안목이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그리고 세종은 시스템을 통한 인재 확보에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가 정종 때부터 있긴 하였던 집현전을 1420년 학문 연구기관으로 확대 개편하면서 세종의 즉위와 함께 국가 기관으로 승격한다. 그곳에서는 재행연소자( 才行年少者)라하여 재주와 행실이 뛰어난 젊은 인재들을 선발하여 함께 연구 과제를 해결하도록 하였다. 신숙주, 성삼문, 정인지, 최항이 모두 집현전 출신이다. 이후 단종 때까지 37년간 존속하면서 학문 연마와 문화 활동 등이 대거 완성된다.
집현전의 위치는 지금 경복궁에 가보면 수정전이라는 건물이 있다. 이곳이 바로 집현전이 설치된 곳이었고 왕이 주로 집무하는 사정전, 근정전하고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한 모습을 지금도 확인할 수 있다. 그만큼 세종의 집현전에 대한 관심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집현전 학자들은 장기근속자가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 시대의 학자들도 정말 승진도 하고 싶어하고 다른 기관에서도 일하고 싶어 하였다. 대표적 초장기 근속자였던 정창손 (22년 근무), 최만리 (18년 근무), 박팽년 (15년 근무) 등 불만을 가지고 있던 학자들에게 파격적인 휴가를 내줬는데, 이름하여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 즉 지금의 안식년 같은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불만을 잠재웠다.
그리고 이 집현전에는 주로 옛날 제도에 대한 해석과 함께 정치 현안에서 가장 필요한 정책 과제들을 연구하게 했다. 예를 들어 주택 관련 옛 제도 조사, 중국 사신 접대 방안 마련, 소금 관련 연구, 외교 문서 작성, 약초 조사 등 다방면의 연구 조사를 실시하여 창출된 성과를 정책에 반영하였다. 뿐만 아니라 왕을 교육하는 경연관, 왕세자를 교육하는 서연관, 과거시험을 주관하는 시험관,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 등의 역할을 수행하며 조선의 문물과 제도 정비에 중요한 역할을 한 기관이었다. 그리하여 집현전은 세종의 배려 속에 수백 종의 연구 보고서 50여 종의 책이 편찬되었고 의학, 역사, 의례, 국방 등 다양한 저술이 편찬되면서 조선 전기 학문과 문화의 꽃을 피우게 된다.
즉, 세종은 혼자의 독단적인 권력으로 정치를 한 것이 아니라 인재를 체계적으로 양성하는 시스템을 확보하고 장기적인 비전을 바탕으로 새로운 정책을 만들었다. 세종은 '인사가 만사'라는 원리를 터득하고 실행했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인재의 적재적소 등용, 그리고 그 인사를 활용한 성과 창출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낸 아주 스마트한 군주였던 것이다. 이는 현재의 정치 활동과 기업 경영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Daddy’s Point of View =============
어떤 성과를 내기 위해서 혼자의 역량으로는 부족한 부분이 많다. 물론 탁월한 천재는 여러 명이 할 수 있는 아이디어 창출과 실행을 하기도 하지만 범인들의 경우는 집단 지성을 이뤄 좋은 성과를 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기업이나 국가 뿐만 아니라 친구 관계, 사회 관계도 마찬가지다. 주변에 얼마나 좋은 인재가 많으냐에 따라 그 집단은 앞서갈 수 있으며 개인도 많은 점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잘해주는 친구보다 나에게 도움이 되는 친구를 찾아 친해지도록 노력해 보자. 그리고 누구는 그랬다더라, 어느 소속 집단에서 내가 가장 똑똑하다고 느껴진다면 그곳에서 바로 탈출해야 한다고. 내가 배울 것이 없는 집단에서는 더 있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운다. 무엇을 배우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경쟁력이 결정된다. 명심해라, 세상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집단으로 뭉쳤을 때 비로소 힘이 생긴다는 것을.
#세종 #리더십 #장영실 #황희 #집현전 # 재행연소자 # 사가독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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