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 우리는 프로이센이 덴마크와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하여 유럽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고 있을 때 그 중심에 비스마르크라는 천재적인 외교관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했어. 외국과의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필요한 국방력과 외교력을 동시에 겸비했던 인물이지 않을까 싶어. 자세한 이야기는 전편을 살펴보도록 하고 오늘은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독일 연방에서 오스트리아를 제끼고 북부 독일 연맹을 결성하고 거기서 짱 먹으며 유럽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는 가운데 이제는 옆에 위치한 또 다른 대국 프랑스와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는 비스마르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볼 거야.

독일 지역에서 프로이센이 급부상하던 19세기 중반 서유럽에서는 또 다른 변혁이 일어나고 있었어. 스페인에서 1868년 혁명이 일어나 부르봉 왕가가 쫓겨나고 혁명 지도자들은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 국왕의 사촌인 레오폴드 공에게 왕위에 오를 것을 제안했어. 비스마르크의 프로이센은 좋아했지만 당연히 프랑스는 반발했어. 결국 스페인에서 레오폴드 공이 왕위에 오르는 것이 무산되었고, 1870년 7월 프로이센의 프랑스 대사는 엠스 온천에서 사우나를 즐기던 빌헬름 1세에게 호엔촐레른가의 스페인 왕위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아오려 했지만, 이 무례한 상황을 빌헬름 1세가 비스마르크에게 꼰질렀고 비스마르크는 이를 교묘히 이용했어. 프랑스 대사의 무례함으로 빌헬름 1세는 열받아서 이에 대한 대응을 할 것이라고 상황을 꼬아서 영국의 한 언론에게 전보를 치면서 발표해. 이것이 그 유명한 '엠스 전보 사건'인데, 이 사건으로 양국의 긴장은 극단을 치닫게 되었어.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와의 긴장이 곧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것을 미리부터 예상하고 있었지. 아니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프랑스와 전쟁을 하려고 명분을 찾고 있었다는 것 같아. 프로이센은 남부 독일 연방 국가들로부터의 군사적 지원을 받으면서 꾸준히 군력을 증강했고 러시아 제국을 비롯한 여러 유럽 열강으로부터 중립을 받아 냈어. 그의 치밀한 계획하에 1870년 엠스 전보사건을 빌미로 프로이센은 곧바로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게 되지. 흔히 말하는 보불전쟁이 발발하게 된거지. 비스마르크의 정확한 예측과 그에 따른 대응과 계획, 외교술로 2개월도 채 안돼서 프랑스군은 프로이센군에게 스당(Sedan)에서 항복하고 강화를 제안했어. 스당 전투에서 패한 나폴레옹 3세는 포로로 잡히는 수모를 겪기도 했지. 하지만 비스마르크는 강화를 거절하고 1871년 1월 파리를 무력으로 정복해 버려. 하지만 주변국들의 중립 노선이 흐트러질 것을 우려해 프랑스로부터 알자스-로렌 지방을 할양 받고 50억 프랑스 프랑의 전쟁 보상금을 받는 조건으로 프랑크푸르트 조약을 체결하고 전쟁을 종결짓지.
재밌는 것은 파리를 정복하자마자 파리의 베르사유 궁전 유리의 방에서 독일 제후들을 초청해 빌헬름 1세를 황제로 추대하며 독일제국을 선포해. 이로써 독일 제2제국이라 불리는 독일제국이 탄생하게 되지. 베르사유 궁전에서 탄생한 독일제국은 4개의 왕국, 18개의 공국, 3개의 자유시 등 25개의 국가와 2개의 제국령(알자스-로렌)으로 구성된 연방 국가가 탄생한 거였어. 비스마르크는 1871년 독일제국의 제국 수상이 되었지. 그야말로 유럽 역사의 대 전환점이 일어난 거야. 비스마르크는 즉각적인 개혁을 단행했어. 마르크를 단일 통화로 지정하고 은본위 제도에서 금본위제로 변경하면서 제국은행을 설립했지. 도량형도 통일하여 미터법을 사용했어. 이는 독일 내의 산업의 발달에 따른 경제력의 상승에 기초한 것이었지.

그는 외교와 국방적인 측면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지. 1873년 독일제국, 러시아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간의 삼제동맹, 1879년 독일-오스트리아 동맹, 1882년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 사이의 삼국동맹 등 주변국과의 동맹을 공고히 다지는 한편, 아프리카와 태평양 일대에 식민지 건설을 확대하였어.
국내 정치에서 극우파 보수주의자였던 그는 가톨릭과 사회주의를 탄압하는 반면, 1880년대에 건강보험, 산업재해보험, 노령연금, 장애인연금보험 등 복지개혁을 추진해 정부가 시민의 복지를 책임지는 세계 최초의 복지국가가 되도록 했어. 이는 시민들에게 적당히 당근을 나눠주면서 불만을 잠재워 혼란스러운 시기에 혁명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한 방책이었던 거지. 아이러니하게 지금 좌파 사회주의 진영에서 부르짖는 복지국가는 애초에 극우 보수주의자에게서 탄생했단 말이야.

기본적으로 비스마르크는 평화주의자, 협상주의자로 전쟁으로 인한 확장은 지양하는 인물이었어. 실제로 프랑스와의 전쟁을 치르고 통일을 이루고 나서는 특별한 전쟁에 나서지 않고 각국의 동맹 체결과 프랑스의 고립에 주력했으며 경제와 내치에 전념했어. 그가 주군으로 모시던 빌헬름 1세가 죽고,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1세가 황제에 등극하였지만 제위 시 이미 후두암의 병치레를 하고 있었기에 큰 변화는 없었어. 프리드리히가 제위 99일 만에 죽고 그의 아들 빌헬름 2세가 혈기왕성한 24세의 나이로 황제에 등극하면서 비스마르크와 여러 면에서 충돌하였다고 해. 젊은 황제는 제국주의적 식민지 획득과 세력 확대, 범게르만주의를 표방하는 세계정책을 주창하며 비스마르크의 정책과 대립을 폈어. 결국 1890년 비스마르크는 빌헬름 2세에 의해 해임당해. 그는 물러나면서 '이런 식으로 가면 내가 떠나고 15년 후엔 파멸이 올 것이다.'라고 했다고 해. 그의 예언은 현실이 되었던 것일까? 빌헬름 2세의 확장정책은 1914년 1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고 말았지.
Daddy's Point of View ===============
세계 1차 대전을 언급할 때 항상 제일 먼저 등장하는 사건 중의 하나가 삼제동맹, 삼국동맹이지. 그만큼 세계적 정세에 큰 영향을 미치며 세계 대전의 발발을 유발하는 큰 사건이었는데 그 중심에 비스마르크가 있었다는 것은 매우 안 궁금한 안 비밀이지. 비스마르크가 히틀러와 많은 부분에서 닮았다고 했는데, 범 게르만 주의와 제국주의적 팽창, 국민의 마음을 이해하고 원하는 것을 풀어주는 측면에서 큰 지지를 받는 인물들이지. 하지만 비스마르크는 멈춰야 하는 지점을 알고 있었지. 히틀러는 반면에 그게 없었고 멈출 수 없는 폭주 기관차가 되다 보니 한번 멈추면 끝장이 나니 계속 악셀을 밟고 있었던 거야. 결국 CRASH!! 히틀러는 망했지. 만약 히틀러가 비스마르크와 같이 멈춰야 하는 지혜와 중용의 용기가 있었다면 아마도 지금 유럽에서 정치적이나 군사적으로 러시아나 영국보다도 훨씬 리딩 하는 위치에 있었을 거 같아. 그래서 미국과의 맞짱 대결에서 유럽을 대변하고 대표하는 국가적 위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지.
물론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말은 참으로 의미 없는 일이긴 하지만 비스마르크라는 인물이 히틀러를 대체했다면 역사는 완전히 다른 판으로 흐르지 않았을까 싶어. 그만큼 비스마르크의 영리함에 감탄이 절로 나오네. 아빠는 너희들이 비스마르크처럼 역사적 위인이 되라고 이야기하지는 않을 거야. 비스마르크처럼 우리는 귀족 출신도 아니고 경제적 배경이 빵빵한 것도 아니니깐. 하지만 비스마르크처럼 큰일은 아니더라도 작은 일에서 비스마르크의 지혜를 배운다면 너희들도 큰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야.
그러기 위해서 끊임없는 자기 질문과 사태와 상황의 정확한 판단을 위한 현상의 계속된 분석이 필요할 거야. 그냥 물 흐르는 대로 사는 것보다는 신명 나게 세상을 흔들어 보면서 살고 싶지 않니? 아빠가 하지 못했으니 너희들이라도 그렇게 살아보면 어떨까 하면서 비스마르크의 이야기를 마치도록 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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