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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역사 이야기

관세의 역사

by 브라보 오스카 2025. 4. 5.

 

지금부터 한국산 모든 제품에 25%의 상호 관세를 붙이기로 결정한다.

 

▶ 2025년 4월 2일 상호 관세를 발표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2025년 4월 2일 트럼프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세상이 뒤집어지고 있지. 특히 우리 같이 힘이 없는 약소국은 깨갱도 못하고 그냥 앉아서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고 있어.

 

그러면 지금 너무나도 핫한 관세가 무엇이고 관세의 역사는 어떻게 전개되었는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사실 관세의 역사도 아주 재미있단다.

 

‘관세’를 국립국어원에서 편찬한 표준국어대사전에서 ‘국세의 하나. 관세 영역을 통해 수출 수입되거나 통과되는 화물에 대하여 부과되는 세금으로 수출세, 수입세, 통과세의 세 종류가 있으나 현재 우리나라에는 수입세만 있다. 비슷한 말로 통관세가 있다.’라고 정의하고 있어. 영어로 관세는 보통 'tariff'라고 하지만 'customs'라고 하기도 해. 'tariff'는 수입에 대한 세금을 의미하고 'customs'는 세관을 의미하지. 근데 'customs'가 좀 더 넓은 의미가 있고 'tariff'는 관세율에 관한 협의로 해석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할 수 있어. 관세라는 말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 처음 등장하는데, 이때는 'customs'라고 쓰였어. 관습적인 지불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이라는 썰이 있어.

 

깊게 들어가면 법률적, 경제적 측면에서 논의할 가치가 큰 주제임이 분명해. 복잡한 건 나중에 너희들이 더 자라서 배워보도록 하고, 오늘은 관세가 언제 어떻게 처음 등장했고, 어떤 역사적 사건이 있었으며, 한국에는 언제 처음 도입되었는지를 알아보도록 하자꾸나.

 

관세는 사실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 커. 하지만 관세가 처음 등장하게 된 것은 오히려 물건을 파는 쪽, 즉 수출하는 국가에서 수출하는 업자에게 부과한 세금이었어. 보스턴 차 사건의 빌미가 되었던 영국의 미국 수출 차 세금 부과가 아마 세계에서 처음 등장한 관세라고 보면 될 거야.

▶ 영국 수입 인지. 1765년 3월 22일 조지 3세가 제가 해 발효된 영국의 아메리카 식민지 대상 인지세 증명. 신문, 팸플릿, 출판물과 모든 법적 유효한 증명서, 허가증, 플래카드에 인지를 붙이는 것을 의무화한 법. 식민지인들의 반발로 약 1년간 지속하고 폐지되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1492년에 최초로 발견한 신대륙 아메리카를 놓고 18세기부터 티격태격했었어. 이 광활한 땅의 주인이 서로 자기라고 우기게 되었고 결국 둘 간에 전쟁이 일어났어. 소위 ‘프렌치 인디언 전쟁’이라 불리는 이 전쟁은 1756년부터 1763년까지 약 7년간 벌어진 전투여서 유럽에서는 ‘7년 전쟁’이라 불리기도 하지. 이 전쟁에서 '인디언'이라 불렸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프랑스 편을 들어 영국과 대적해서 싸웠다 해서 영국 입장에서 '프렌치 인디언 전쟁'이라 불리는 거야. 여하튼 이 전쟁에서 영국은 승리하고 북아메리카에서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어. 하지만 승자의 저주라는 말이 있듯이 영국에도 전쟁의 승리 후 심난한 경제난을 겪게 돼. 전쟁에 돈을 많이 쏟아붓다 보니 국내 경제가 휘청거리는 거야. 그래서 전쟁이 끝난 직 후 결정한 게 식민지 미국에 세금을 어마 무시하게 부과하자였어. 모든 종이에 인쇄된 물건에 붙이는 '인지세(Stamp Act)'가 1765년에 발효되었고, 이어 1767년 재무장관이었던 찰스 타운센드에 의해 발표된 일명 '타운센드 법' 중 일부가 식민지 세수 증대를 위한 법안으로 발효되었어. 그래서 미국으로 수출되는 모든 제품에 대해 높은 관세가 부과되고 이는 식민지 아메리카인들의 반발을 일으켰어. 그리고 결정적으로 아메리카 식민지인들이 차를 즐겨 마셨는데, 이 차에도 높은 관세가 매겨지게 되었지. 원래 차는 중국, 인도에서 찻잎을 생산해서 영국에 들어온 다음에 미국으로 팔았었어. 그런데 이 차가 영국에서 오는 물품이었기 때문에 차에 대해 높은 관세가 부과되었고 식민지인들은 불만이 있었지. 그래서 기회는 찬스라라고 외친 밀수업자가 차를 아예 중국 인도에서 바로 들여온 거야.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영국에서 온 비싼 차가 안 팔리는 거지. 영국은 이걸 보고 밀수업자를 차단할 엄두가 나지 않아 그냥 차에 대한 관세를 없애버려. 그러니까 다시 밀수업자들이 큰 타격을 입자 이들이 영국에서 들여온 차를 싣고 보스턴에 정박해 있던 배에 아메리카 원주민으로 분장해서 올라가 차 박스를 바다에 던져 버려. 이로 인해 1773년 보스턴 차 사건이 일어났고 이어 1775년 아메리카 식민지 군대와 영국 군대와의 전쟁이 발발하고 이는 1776년 미합중국 독립 선언으로 이어지는 근대사의 큰 사건으로 기록되었어. 어떻게 보면 관세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고 그 전쟁으로 미국이라는 나라가 탄생하게 된 거지.

▶ 아메리카 식민지를 옷이 벗겨지고 강간을 당하려는 여성으로 나타내어 영국의 아메리카 식민지 세금 부과를 풍자한 삽화

 

너희들은 미국의 남북전쟁이 흔히 노예 해방에 대한 견해 차이로 전쟁이 났다고 생각을 하고 있겠지만 이 전쟁도 어떻게 보면 관세로 인해 촉발되었고 결국 돈 때문에 생긴 전쟁이라 해도 틀리지 않아.

 

이게 끝이 아니야. 미국은 또 19세기에 와서 남과 북으로 서로 갈등을 겪고 있었어. 북부는 공업이 발달하여 노동자 계층이 태동을 하고 있었지만 남부는 농업, 특히 면화 농업이 발달해서 대규모 노동력이 필요했고 그 노동력을 흑인 노예로 충당했었어. 그런데 영국은 그들의 발달된 공업으로 양질의 물품들을 아주 낮은 가격에 미국에 팔았어. 그러다 보니 미국은 공업 산업의 자체 경쟁력을 갖지 못하고 영국에서 들어오는 물품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어. 특히 공업이 산업과 경제의 메인이었던 북부는 타격을 심하게 받았어. 오히려 남부는 공업 생산시설이 아예 없었기 때문에 낮은 가격의 영국 제품들이 들어오는 게 그들은 더 이득이었던 거야. 그런데 미국에서는 북부의 공업 산업을 살리고자 영국에서 들어오는 공산품들에 대해서 높은 관세를 매기게 되었지. 그러다 보니 영국산 수입 공산품의 가격은 치솟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북부 공업 생산물들은 경쟁력을 얻게 되었지만 남부는 그들이 주로 사용하고 있던 제품들의 가격이 올라가니 불만이 생기게 되었어. 영국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어. 미국에서 영국으로 많이 수출하고 있었던 것이 면화였는데 이들에 대해서 보복 관세로 맞대응을 한 거야. 남부는 그들의 생산물에 관세가 매겨지니 다시 한번 더 타격을 받게 되어 불만이 따블로 생기게 되었던 거야. 그래서 남부는 미국의 영국 제품에 대한 관세 부과 철폐를 주장했고 이에 대한 갈등으로 1861년 남부는 7개 주가 연합하여 아메리카 연합(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으로 독립을 선언하면서 결국 남북은 4년 동안 전쟁을 하게 되었던 거지. 여기서 더 재밌는 사실 하나가 있는데, 사실 영국 입장에서는 북부보다는 남부를 지지했어. 그도 그럴 것이 남부가 승리를 하게 되면 아메리카의 농작물을 낮은 가격에 사고 그들에게 자신들의 공산품을 많이 팔 수 있어서지. 그래서 영국은 남부를 비밀리에 지원하게 되었어. 무기와 자금을 대어 주다가 아예 참전을 생각하지. 영국은 이참에 다시 한번 아메리카를 먹어버릴 심산이었던 거지. 이를 알게 된 북부는 링컨 대통령이 한창 전쟁 중이던 1863년 느닷없이 노예 해방 선언을 해. 그러면서 전쟁의 명분이 노예 해방 운동으로 바뀌게 된 거야. 영국은 그 명분에 대응할 논리를 찾지 못해 남부 지원을 못 하게 되었어. 결국 북부의 승리로 끝났던 거지. 노예제 폐지라는 거창한 캐치프레이즈로 멋진 승리를 한 북부였지만 사실은 돈 때문에 생긴 전쟁이었다라고 얘기해도 될 거야.

▶ 독일 관세 동맹 영역의 변천(왼쪽)과 철혈재상 오토 본 비스마르크(오른쪽) - 파랑 1834년, 회색 1866년, 노랑 1866년 탈퇴한 지역, 빨강 1828 독일 연방

역사적으로 관세에 대한 또 다른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 지난번에 프로이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었는데, 비스마르크가 느슨한 독일 연방을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하여 끈끈하게 만든 것이 1834년 독일 연방 내의 무역에 대해 관세를 폐지하는 관세 동맹을 선언한 거였어. 여기에 오스트리아는 자국 산업에 대한 강력한 보호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맹에 들어오지 못했고 지금까지 독일과 서로 다른 국가를 이루고 있는 이유이지. 결국 독일 관세 동맹으로 인해 독일은 통일을 이루어 제2제국으로 재탄생하고 세계 대전까지 일으키는 상황에 다다르지.

▶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는 조일 양국 대사들. 미국에게 당했던 방식 그대로 따라 해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조선을 개항한 일본은 본격적인 조선 수탈을 시작했다. 일부 보수 언론에서는 이 조약이 조선의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며 일본은 조선에 최대한 예를 갖췄고 이를 통해 조선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월간조선에서는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의 관세는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을까? 우리나라는 1876년 조선시대의 부산항에서부터 시작이 돼. 1876년은 우리나라가 외세에 의해 최초로 개항을 결정한 일본과의 강화도조약을 맺게 되지. 일본은 이를 통해 무관세 무역을 시작해. 사실 이 조약은 일본의 경제적 침탈을 위한 불평등 조약이었던 거야. 그 당시 조선은 관세라는 개념을 전혀 모르고 있었겠지. 일본의 강력한 무력 앞에 원하는 대로 해줄 수밖에 없었던 거야. 일본 상인들은 관세가 적용되지 않는 금액으로 마음대로 값을 조절하면서 물건을 사고팔았어. 그러다 보니 조선에서는 상업과 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값싸고 질 좋은 일본 제품이 들어오면서 망할 수밖에 없었던 거야. 이를 지켜본 조선 조정은 관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어. 하지만 이미 무관세 무역 조약을 맺은 상황에서 일본에게 무턱대고 관세를 요구할 수가 없었지. 그래서 조선의 행정 기관은 일본 상인들과 물물교환을 하며 생활하던 만만한 조선 백성들에게 세금을 내게 했던 거야. 이게 우리나라의 최초 관세였던 거지. 그리고 이후 1882년 미국과도 개항의 조약을 체결하는데 이게 조미수호동상조약이야. 이때는 조선 조정에서 미국의 물품에 10%의 관세를 부과하는 관세를 적용하게 되지. 조선은 다른 나라와의 무역 경험이 부족해서 관세 업무에 대한 티처가 필요했는데 그래서 독일 사람 묄렌도르프를 섭외해서 그를 관세사로 기용을 해. 우리나라 최초의 관세사는 독일 사람이야.

▶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Paul Georg von Möllendorff, 1847-1901) 혹은 목인덕(穆麟德, 한국 이름). 프로이센 왕국 출신의 외교관 겸 언어학자로 조선에서 외교 고문으로 활동

 

Daddy's Point of View =====

관세 때문에 온 세상이 시끄럽다. 벌써부터 중국은 미국의 상호 관세에 보복 관세로 곧바로 맞대응을 했어. 유럽도 미국 투자를 줄이거나 계획을 철회하는 강경 대응을 한다고 해. 이처럼 관세는 자국의 이익을 경제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조치이자 상대방에게는 불이익을 줄 수밖에 없어. 우리는 아직 특별한 대응책을 내놓고 있지는 못하지.

 

우리 입장에서는 상당히 난감할 거야. 맞대응하자니 호미로 막을 걸 괭이가 나서야 될 수도 있는 것이고, 아니면 그냥 받아들이자니 국가적 체면과 손실이 만만치 않고, 협상을 하자니 리더십 부재와 제한된 시간에 따라 대책이 당장 서지 않고.. 첩첩산중이지. 이럴 때 지난번에 언급한 비스마르크 같은 사람이 우리나라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국가가 제대로 위상을 갖추고 선진국이 되려면 여러 가지가 필요하지만 외교력이 경제력 만큼 중요한 거 같아. 사실 인프라적으로만 따지면 우리는 해양 국가에다가 인구도 5천만 명에 경제력도 따라주는데 왜 우리는 항상 큰 나라들한테 끌려만 가는가. 정말 안타까울 따름이야...

 

#관세 #트럼프 #상호관세 #인지세 #타운젠드법 #남북전쟁 #독일관세동맹 #강화도조약 # 묄렌도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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