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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역사 이야기

유럽인에 의한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 영국의 식민지, 미국의 독립

by 브라보 오스카 2024. 2. 11.

미국은 어떻게 세계 최강국이 되었나

너희들도 잘 알다시피 미국은 지금 세계를 지배하고 있지. 미국이 공식적으로 탄생한 것이 1776년이니 지금까지 약 250년밖에 안되는데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모든 부분에서 세계를 휘어 잡고 소위 경찰 국가, 리더 국가로 자타가 공인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면 미국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생겨나고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지금부터 이야기해 보도록 할께.

1. 유럽인에 의한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

미국은 지금 북아메리카에 본토를 가지고 북아메리카 대륙의 북쪽 끝단에 위치한 알래스카와 태평양 한가운데의 하와이 제도를 영토로 가지고 있어 그 면적이 거의 천만㎢, 정확히는 9,834,000㎢로 10만㎢정도인 한반도 면적의 약 100배에 육박하지.

이 땅은 너희들이 잘 알다시피 1492년 대항해시대의 제노바 출신의 탐험가 콜롬부스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지. 정확히는 유럽사람들에게 처음 발견된 거지. 공식적인 기록은 아니지만 문명 사회에서 아메리카 대륙이 처음 발견된 때는 중국 명나라 영락제 때의 환관이자 무관이자 탐험가인 정화에 의해 발견된 1418년이라는 주장도 있지. 어찌됐든 그때에도 이미 아메리카 대륙에는 사람들이 그들만의 문화를 꾸리며 살고 있었어. 소위말하는 아메리카 인디안이라 일컬어지는 원주민은 생김새가 동아시아인과 유사하여 12,000년에서 4만년전 빙하기때 건너간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

▶ 정화의 탐험을 바탕으로 작성한 세계지도

미국이 역사에 본격적으로 출현한 15세기에는 유럽에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중심으로 해외 식민지를 마구잡이로 넓혀가는 대항해 시대였어. 콜롬부스는 세계는 둥글기 때문에 유럽에서 서쪽으로 가면 동방, 즉 인도에 더 가깝게 다다를 수 있다고 주장했어. 그래서 그걸 증명하기 위해 1485년 그가 살고 있던 포르투갈의 국왕 주앙2세를 찾아가 신항로 개척을 위한 후원을 요청하게 되지. 하지만 당시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서해안 탐사에 보다 적극적이었고 서쪽 항로 개척이 현실성이 없다는 판단으로 콜롬부스의 제안을 거절하지. 포기하지 않은 콜롬부스는 에스파냐를 찾아가 여러 차례의 프리젠테이션을 통해 당시 여왕 이사벨1세가 전격적으로 후원 약속을 해주게 되지. 정식적으로 계약을 한 날짜가 1492년 4월 30일이야. 콜롬부스는 왜 이렇게 신항로를 개척하려 했을까? 그렇지, 다 돈때문이지. 콜롬부스는 자기가 새로운 항로를 통해 얻게 되는 지역의 총독과 얻은 수익의 10%를 갖는다는 조건을 내걸었던 거야.

그래서 어쨌든 콜롬부스는 그해 그가 계산한 신항로를 통해 육지를 발견하게 되지. 그가에스파냐의 팔로스항에서 싼타마리아호를 타고 떠난지 33일만에 육지를 발견했는데, 그게 원주민들이 과나하니라고 부르는 섬에 도착하게 되지. 지금의 카리브해에 있는 서인도제도야. 그는 그곳을 산살바도르라 명명하고 스페인 영토임을 선언하게 돼. 콜롬부스는 스페인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지역의 특산물뿐만 아니라 원주민까지 배에 실고 갔다고 해. 콜롬부스는 그곳을 아시아의 일부라고 생각했고 현지 주민들을 인디오라 불렀어. 인디오는 인도 사람이라는 뜻이야. 아주 지 맘대로지. 어쨌든 그는 그 이후에도 네차례의 항해를 더 하게 돼. 그는 죽을 때까지 자기가 개척한 그곳이 아시아의 한 부분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고 정착한 곳에서 총독 역할을 하며 원주민을 노예로 삼고 무자비한 학살을 했다는 거야.

여기서 유명한 일화 하나를 얘기하고 넘어갈게.

콜롬부스가 항해를 마치고 돌아와 축하 파티를 열었다. 콜롬부스의 탐험을 깎아 내리고 싶어하는 몇몇 인사들이 누구나 서쪽으로 가다보면 발견할 수 있는 일이라 하였다. 그러자 콜롬부스는 그들에게 달걀을 가져와 탁자위에 세워보라 한다. 당연히 아무도 세우지 못했지. 그런데 콜롬부스가 달걀을 깨서 세운거야. 그랬더니 다들 그런건 나도 하지, 치. 라고 얘기하자 무슨 일이든 처음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라며 그들을 무안하게 만들었다고 해. 이것이 그 유명한 콜롬부스의 달걀이라고 전해지는 일화야. 이는 이탈리아의 역사학자 벤조니가 1565년 그의 저서 신세계의 역사에 소개해서 발상의 전환을 통한 새로운 업적을 세웠을 때 일컫는 말이 되었어. 그런데 이마저도 사실이 아니라는 얘기가 있어. 흠

어쨌든 나중에 그곳이 인도가 아니라 신대륙이라고 알려지게 된 것은 피렌체 출신의 또다른 탐험가 아메리고 베스푸치에 의해서야. 그는 1497년부터 1504년까지 신항로를 통해 새로운 대륙으로 탐험, 보다 정확히는 약탈을 하러 갔지. 그러면서 그곳을 자기 이름을 따서 아메리카, 즉 아메리고의 땅이라고 명명하게되니 아직까지 그곳을 아메리카로 부르고 있어.

이후에도 신대륙에 유럽의 약탈자들이 계속해서 들어왔어.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먼저 시작하고 이 땅이 괜찮아 보이니 옆의 영국과 프랑스도 뒤늦게 아메리카 대륙으로 들어오게 되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주로 플로리다와 중남미에 정착하면서 식민지를 건설하여 금광 개발과 노예 사냥을 하고 있었고 후발주자인 네덜란드, 영국과 프랑스는 주로 북아메리카를 먹어가고 있었어. 북아메리카에는 1607년 영국이 현 버지니아 지역에 제임스 타운을, 프랑스는 1608년에 퀘벡을, 1624년에는 네덜란드는 맨하튼에 식민지를 건설하게 돼.

2. 영국의 식민지

한편 영국에서는 1600년대에 사이비 취급을 받아오던 청교도신자들이 종교적 박해를 피해 영국에서 탈출하여 네덜란드로 건너가 살게 되지. 네덜란드에서도 여전히 이주 노동자 취급을 받으며 3D업으로 연명하며 근근히 살고 있었어. 그러던 와중에 신대륙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드디어 1620년 9월 16일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영국의 플리머스를 출발하여 지금의 메사추세츠주에 도착하게 돼. 이때 그들 자신을 Pilgrim Fathers, 즉 순례자들로 자칭하고 35명의 신도와 67명의 일반인이 건너오게 되지. 이들이 미국의 최초 개척자로 여겨지고 있어.

그런데 왜 하필 청교도들이었을까? 청교도는 기존 그리스도교와 뭐가 다를까? 이건 다른 시간에 알아보도록 하는게 좋을 것 같아.

이들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주의자들과 달리 원주민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해. 현지인의 도움을 받으니 얼마나 쉽게 정착할 수 있었겠어. 그들과 함께 조화로운 생활을 하며 첫 수확을 이뤄냈던 1621년 가을에 커다란 잔치를 벌이고 그들을 도와줬던 원주민 전사들을 초대해 같이 즐겼다고 해. 이들은 칠면조, 호박, 옥수수 등으로 3일밤낮을 아주 씐나게 놀았다고 해. 이게 최초의 Thanksgiving Day, 즉 추수감사절인거야.

하지만 그로부터 약 10년 뒤 원주민들은 유럽인들이 전파한 천연두에 의해 거의 몰살되사시피 해.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에도 언급된 내용이지만 유럽인들이 몰고 온 가축들에 의해 아메리카에서는 발견되지 않은 희한한 전염병들이 돌게 되어 면역력이 없던 원주민은 속절없이 죽어 나가고 말았던 거야. 당시 아메리카 원주민 인구는 대략 8천만이었다고 해. 그런데 이 많던 인구가 천연두와 같은 전염병 때문에 8백만까지 줄었다고 해.

반면 영국 이주민들은 식민지에서의 노동을 통해 부와 자본을 축적하게 되지. 심지어 1628년에는 매사추세츠만 식민지 회사까지 설립하게 되지 이주민들의 대거 신대륙 식민지로 유입하게 된다. 이때는 핍박받는 청교도들뿐만 아니라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건너온 사람들로 인구가 넘쳐나게 되지.

그래서 지금의 미국 북동부는 영국을 비롯해 프랑스, 네덜란드와 원주민간에 쉴새없는 전투가 벌어지게 되지. 그러던 와중에 영국과 네덜란드가 1652년부터 1784년까지 4차례의 전쟁이 벌어지고 네덜란드는 결국 맨하튼을 영국에게 할양하게 된다. 그래서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뉴네덜란드는 영국령으로 바뀌면서 뉴암스테르담이 뉴욕으로 바뀌게 돼.

영국 본토에서는 때마침 1688년 명예혁명이 일어나 정치적 혼란기에 있었고 다른 연방 식민지에 비해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그래서 미국의 식민지에서는 각자 자체적인 정치 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했지. 그러면서 100여년이 흘러가면서 높은 출산율과 계속해서 유입되는 이주민들, 아프리카와 남미에서 잡아들여온 노예들로 인해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재밌는 것은 미국 식민지인의 평균 수명이 영국인들보다 약 10년이나 많았다고 해. 그만큼 살기 좋았다는 얘기지.

3. 미국의 독립

하지만 1773년 보스톤 차 사건이 발생하게 되면서 본토 영국과 아메리카 식민지는 갈등이 극에 달하게 되지. 이 사건은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쟁탈전이 직접적인 원인이 된거야.

프랑스가 아메리카대륙의 식민지를 계속 확장하자 영국의 식민지와 잦은 전투가 발생하게 되지. 그러면서 1754년 영국과 프랑스는 결국 본토인 유럽에서 본격적으로 붙게 돼. 결국 이 전쟁에서 프랑스는 영국에 패해 아메리카 식민지 전부를 영국에 할양하게 되지. 영국은 기존 식민지의 4배에 달하는 영토를 갖게 되고 식민지 숫자는 13개로 늘어나고 인구는 260여만명으로 영국 본토의 3분의 1까지 많아지게 돼.

하지만 영국이 프랑스와 전쟁에서 이겼다고는 하지만 전쟁에 쏟아 부운 돈이 어마무시했다고 해. 6천5백만 파운드라고 하네. 지금으로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엄청난 금액이었다고 하지. 그래서 영국은 이 돈을 만회하려고 미국 식민지에 엄청난 세금을 부과하게 된거야. 거의 모든 소비재에 세금을 매기게 되지. 심지어 유서에도 세금을 매겼다고 해. 그 유명한 대표없이 과세없다, 영어로 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 이지. 식민지에서 선출된 국회의원이 영국 중앙 의회에 참석을 못하게 하면서 세금을 부과해 이런 슬로건과 불만이 나오게 된거지. 이는 미국 독립전쟁 때 슬로건으로 사용되기도 해.

그래서 영국은 모든 과세를 없애 버린다. 홍차만 빼고. 그런데 영국은 동인도회사를 통해 동양의 홍차를 미국 식민지에 팔았는데 이때 관세가 없어 식민지에서 생산하는 차에만 세금이 붙어 결국 식민지 경제에 타격을 가하게 되지. 이러한 꼼수에 미국 식민지인들은 더욱 큰 저항을 하게 되지. 급기야 1773년 12월 16일 항구에 정박해 있던 홍차 수입선에 인디언 분장을 한 식민지인들이 몰래 들어가 홍차 박스를 모조리 바다로 던져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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