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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역사 이야기

315부정선거, 419의거, 장면정권

by 브라보 오스카 2024. 1. 18.

#419혁명 #315부정선거 #이승만 #이기붕 #조병옥 #장면 #이정재 #임화수 #정치깡패 #김주열 #이강석 #이승만하야 #내각제개헌 #장면내각

껍데기는 가라

-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中立)의 초례청(醮禮廳)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漢拏)에서 백두(白頭)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 '52인 시집' (1967) 중

신동엽 시인은 현대의 저항 시인으로 일컬어진다. 그는 '껍데기는 가라'라는 시에서 껍데기를 구시대적 유물, 독재와 권위, 반봉건/반민주 세력을 빗대어 말한다. 이 시는 4.19 혁명을 배경으로 쓰여진 것이지만 이후 군화발에 짓밟히는 민주주의를 안타까운 심정으로 적어 나간다.

앞서 '서울의 봄' 영화를 보며 대한민국 민주화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어 우리 근현대사에 민중의 힘으로 독재 권력을 실제로 뒤집어엎은, 실로 혁명이라 할 수 있는 4.19혁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1. 315부정선거

때는 거슬러 올라, 1960년으로 간다. 대통령/부통령 선거가 한창이다. 대통령 후보로는 자유당 이승만 현 대통령과 민주당 조병옥 후보가, 부통령 후보로는 자유당 이기붕 민의원장, 민주당 장면 현 부통령이 나선다. 선거전 갑자기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욱이 미국에서 사망하자 이승만이 단독 후보로 나서게 되어 당선이 확실시되었으나 부통령은 이기붕이 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리하여 자유당은 계획적인 부정선거를 저지른다. 이정재, 임화수 등 정치깡패를 동원하여 야당의 선거운동을 방해하고, 사전에 이승만/이기붕이 기표된 용지를 무더기로 만들어 투표 전에 모든 투표함에 집어 넣었다. 개표 중 이승만과 이기붕의 득표율이 100% 가까이 나오자 너무 많이 나올 것을 우려해 이승만측에서 70%선으로 맞추라고 지시해 각 개표 지역에서 감표에 들어가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도 연출되었다. 어느 지역에서는 투표지가 유권자 수보다 많이 나오는 상황도 있었다고 한다. 이 선거가 60년 3월 15일에 있었는데, 이를 3.15부정선거라 일컫는다. 결국 이 선거에서 이승만은 100%, 이기붕은 79.2%로 당선이 되었다.

2. 419의거

대놓고 부정선거를 저지르다 보니 여기저기서 국민들이 항의하기 시작했다. 항의는 정치깡패의 대응으로 나왔고 이는 다시 시위의 확산으로 이어졌다. 그러던 와중에 마산(지금의 창원)에서 3월 15일 시위에 참가한 고등학생 김주열이 행방불명된 뒤 4월 11일 마산 중앙부두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발견된다. 이 소식이 전국적으로 퍼지면서 국민들은 분노했다. 서울의 고려대에서는 4월 18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시위를 진행 중이었는데, 시위 후 귀가하던 학생들이 정치 깡패의 공격을 받고 한 명이 사망하고 여러 명이 중상을 입는 사고가 난다. 고대생 피습 사건은 여러 면에서 시위의 양상을 바꿔 놓았다. 학생 시위의 주역을 지방 고등학생의 죽음에서 서울의 대학생으로, 부정선거 규탄에서 독재 정권 타도로 확대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국의 대학생들을 거리로 뛰쳐나오게 만들며 전국적인 시위, 항거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 4.19혁명은 이승만 정부의 불법선거와 경찰의 폭력에 대항해 자유와 정의, 진리를 부르짖는 의거였다.

In my younger days I certainly knew my people well and even now felt myself certainly one of them.

사회 전 계층으로 확산되어 시위가 확산되자, 주한 미국 대사였던 W. P. 매카나기가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서 하야할 것을 권유, 설득하였을 때 이승만이 그에게 한 대답이다. (1960년 4월 25일)

3. 장면정권

정치 깡패의 무력 진압, 계엄령, 경찰의 발포로 대응한 이승만 정권은 대학교수, 중고생, 일반 시민들까지 확대된 항거를 이기지 못하고 4월 26일 라디오 방송을 통해 하야를 선언한다. 이승만은 부인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곧바로 하와이로 망명을 떠나고 장면 부통령 역시 사임한다. 다음 권력자인 수석 국무위원 외무부 장관 허정이 대통령 권한 대행을 맡는다. 부통령 당선자 이기붕은 허정의 권유로 망명의 선택을 하였으나 그의 아들(이자 이승만의 양아들) 이강석은 아버지 이기붕을 비롯하여 어머니, 남동생 모두를 총으로 사살하고 본인도 자살한다.

같은 해 6월 내각제 개헌이 이루어지고 8월 국회 선거를 통해 윤보선이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윤보선 대통령에 의해 윤보선이 지명한 장면이 내각 수반 총리로 당선되면서 제2공화국이 출범하게 된다.

한편 4.19혁명을 지켜보던 북의 김일성은 외교적 노력을 통해 주한미군 철수와 남한의 평화적 접수를 꾀하였다.

그러나 2공화국 출범 1년도 채 안 된 시점에 박정희와 그의 측근들에 의해 다시 군사 독재 체제로 들어가며 다시 국민은 억압과 통제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Daddy's Point of View ======================================================================

419시민혁명은 독재에 항거하는 우리 민족의 저력을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다.

20살 전후의 어린 학생들이 주도가 되어 민주화를 외치며 거리로 나왔다. 그런 용기는 어디서 왔을까? 이 세상에 정답이라는 것은 없다. 민주화가 시대의 흐름이긴 하나 그것이 정답이라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3천만 국민이 모두 민주화를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신념이 옳다고 믿으며 그것을 주장하기 위해 거리로 뛰쳐나왔던 젊은 그대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할 말을 하고 사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을까.

영화 '서울의 봄'과 맥은 약간 다르지만 동시대에 일어난 비극적인, 그러나 몇 안 되는 성공적인 시민 혁명을 아빠는 응원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때 젊은이들이 흘린 피의 대가로 얻는 것이 진짜 '서울의 봄'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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