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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역사 이야기

부패는 혁명을 부른다 : 유럽의 종교개혁

by 브라보 오스카 2024. 10. 5.

유럽은 기독교가 압도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사회이다. 하지만 기독교는 이슬람과 유대교와 더불어 같은 뿌리를 두고 있는 유일신 종교로 유럽에서 뿌리내리는 데에 많은 아픔이 있었다.
 
기독교가 생겨난 것은 예수가 기원 전후 태어나면서였다. 예수는 그가 설파한 평등사상으로 민중들에게는 대단한 호응을 받았지만 기존 유대교의 선민사상에, 로마시대의 신분사회에 극심한 저항을 받으면서 기득권으로부터 탄압을 받았다. 그러던 예수의 기독교는 대세를 거스르지 못하고 교황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로마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된다. 이것이 313년 밀라노에서 포고된 명령이라 해서 밀라노칙령이라 한다. 다신교를 기본 종교로 삼았던 로마에서는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니케아 공의회 (325년 5월 20일) 니케아(현재 터키의 이즈니크)에서 콘스탄티누스 1세의 니케아 별궁에서 열린 기독교 공의회다. 부활절과 삼위일체 등을 논의했으며 니케아 신경을 채택하여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정죄하면서 보편 교회의 정치적 외연을 확대했다.

 
대제국 로마에서 기독교가 공인되자 다시 여러 종파로 나뉘게 된다. 결국 이단과 정통의 논란으로까지 번지게 되면서 이를 정리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나오게 되는데 325년 니케아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이단과 정통의 개념을 정리하게 된다. 삼위일체론을 주장하며 예수를 신격화한 아타나시우스파가 정통으로 공인되고 예수를 피조물, 즉 인간으로 여긴 아리우스파는 이단으로 결정하게 된다.

로마의 흥망성쇠는 기독교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영원할 것 같던 로마제국도 동서로 양분되더니 서로마제국은 476년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을 하게 되며 서유럽으로 역사가 흐르게 된다. 반면 동로마제국, 즉 비잔티움제국은 여전히 건재했다. 서로마제국의 서유럽은 황제는 없어졌으나 교황은 여전히 존재하며 로마의 정신적 영향력은 지배적이었다. 로마인들이 기독교를 앞세워 게르만족들을 회유하고 동화하는데 앞장섰다. 동로마제국도 황제가 교황의 역할을 겸하며 여전히 기독교에 적극적이었는데 하나의 사건이 터지게 된다. 570년에 아라비아반도의 메카에서 태어난 무함마드에 의해 이슬람교가 창시되고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번지게 되었다. 비잔티움제국의 바로 옆에서 퍼지게 되니 비잔티움제국의 황제는 긴장을 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이슬람교의 영향을 받는다.
 

▶ 로마의 분열은 기독교의 분열로 이어진다.
 

이로써 기독교 역시도 로마처럼 동서 둘로 쪼개지게 되었다. 앞서 니케아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몰렸던 아리우스파는 비잔티움의 기독교로 계승되며 그리스정교 또는 동방정교로 발전하게 된다. 반면, 서유럽 지역은 아타나시우스파에 의해 로마 카톨릭교로 발전한다. 이 두 종교는 언어적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많은 부분에서 차이를 보이게 된다. 동방정교는 우상숭배 금지 사상을 추종하는 이슬람의 영향을 받아 726년에 비잔티움제국의 황제 레온 3세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칼케에 장식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대형 황금 성화를 파괴해 버리면서 우상숭배 금지 명령을 내리게 된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은 게르만족에 대한 기독교 포교를 위해서는 종교를 상징할 표식이 필요했었으므로 성상은 유지되고 있었다. 로마 가톨릭과 동방정교는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쓴다는 것 이외에도 예배를 볼 때 가톨릭은 의자를 놓는데, 동방정교는 서서 예배를 본다거나, 사제들의 경우 가톨릭은 결혼이 금지되지만 동방정교는 허용되는 등 차이를 보이게 된다. 동방정교는 러시아로 이동하여 러시아 정교로 발전한다.

서유럽의 가톨릭은 16세기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다시 구교와 신교로 갈리게 된다. 종교개혁의 대표적 인물로는 독일의 루터, 스위스의 칼뱅, 영국의 헨리 5세가 있다. 이들이 어떻게 종교개혁을 이루게 되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독일 작센안할트주 아이슬레벤 태생) 그는 종교개혁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며 근대 종교개혁의 신호탄을 쏜 인물이다.


종교개혁의 개시를 알리게 된 인물이 바로 마르틴 루커(Martin Luther)이다. 루터는 1483년 독일의 한 시골 광부의 아들로 태어난다. 루터는 어려서부터 매우 영민했으며 종교적 신념이 강해 신학을 공부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의 부모는 총기가 탁월했던 그를 법률가로 키워 세속적인 성공을 이루고 싶어 했다. 결국 착한 루터는 엄마 아빠의 뜻에 따라 법률학교에 진학을 한다. 하지만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거대한 번개가 자기 눈앞에 내리치며 고목나무를 넘어뜨리는 광경을 보고 신의 계시임을 느껴 바로 신학교로 전학을 한다.

마침 이때 로마 교황청에서 베드로 성당 증축 자금 마련을 위해 면벌부를 판매하는데 이에 루터는 격렬한 반발을 하게 된다. 면벌부로 인해 사회적 혼란이 컸는데, 면벌부를 사면 심지어 성모마리아를 강간하여도 용서가 된다고 하고, 미래의 벌까지 면해주는 매우 비싼 면벌부를 산 다음에 그 돈을 다시 훔쳐 가는 웃지 못할 해프닝까지 발생하였다. 루터는 면벌부는 성서에 나와있지도 않는 터무니없는 제도라면서 로마 가톨릭을 심하게 비난하였다. 또한 사제의 독신생활도 성서에 있지 않는 내용이라 주장하며 보란 듯이 수녀와 결혼을 하는 패기를 보여준다. 당연히 로마교황청은 바로 루터 족치기에 들어간다. 루터는 1517년 비텐베르크 만성 교회의 정문에 95개 논제를 붙여놓았는데 이는 대대적인 반향을 일으키며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된다. 루터의 교리는 철저하게 성서 본위주의였다. 성서를 공부하고 따르면 형식은 중요하자 않다는 것이다. 교리의 상징과 형식, 율법을 중시했던 로마 가톨릭의 개념과 정면으로 반대되는 내용이어서 이를 프로테스탄트, 즉 신교라 일컬었다.
 

▶ 쟝 칼뱅(Jean Calvin, 1509-1564, 프랑스 피카르디의 누아용에서 출생)은 칼뱅이즘을 창시하여 유럽인 뿐만 아니라 향후 신대륙의 자본주의적 정신의 토대를 마련하게 된다.
 

한편 스위스 지역에서도 칼뱅에 의한 종교개혁이 급속도로 퍼지게 되었다. 쟝 칼뱅(Jean Calvin)은 1509년 프랑스 출신인데 그 역시도 루터와 마찬가지로 부모가 법률가가 되라며 법학 학교에 입학시키지만 독일에서 시작된 개혁신앙에 빠지게 된다. 그는 1533년 11월 1일 파리 대학교에 니콜라스 콥이 학장으로 취임할 때, 그의 취임사를 대신 써주게 되면서 프랑스의 종교개혁을 이끌게 되었다. 그는 인간을 구원해 주는 주체는 오직 신이며 신의 대리인, 즉 사제라도 관여할 수 없다는 부분을 강조하였다. 또한 인간의 운명은 신이 미리 정해 놓았다는 예정론을 펼치며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받았다. 예정론은 신의 선택을 받는 자임을 인정받기 위해 열심히 노동에 종사했으며 그에 따라 생기는 부는 자연스럽게 인정되었다. 부의 축적과 부자에 대해 인색했던 기존 가톨릭과는 아주 상반되는 개념이었다. 이에 따라 자본주의가 발전하게 되는 노동자 계급의 급성장을 견인하였고 향후 막스 베버 이론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의 저서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보면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모든 사람이 같은 상태로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어떤 사람을 위해서는 영생이 예정되며 어떤 사람을 위해서는 영원한 저주가 예정되기 때문이다. 각 사람은 이 중의 어느 한쪽 결말에 이르도록 창조되므로, 우리는 그를 생명 또는 사망에 예정되었다고 한다.

한편 프랑스에서 칼뱅주의 사상에 심취한 개신교 신자들을 위그노 Huguenot라 불렀다. 그들은 그들의 직업을 천직이라 여기며 성실히 노동을 수행하였다. 프랑스에서는 구교와 신교가 첨예하게 대립하여 결국 전쟁으로까지 번지게 되면서 1598년 앙리 4세가 프랑스 국왕이 되면서 신교도들을 인정해 주는 낭트칙령을 선포하면서 대립은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1685년 루이 14세는 낭트칙령을 폐지하고 개신교를 불법이라고 선언하는 퐁텐블로 칙령을 반포하여 다시 위그노들이 탄압을 받게 된다. 그래서 그들 중에는 숙련공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들이 프랑스의 종교개혁 탄압을 피해 스위스를 비롯하여 북아메리카, 남아프리카, 네덜란드 등지로 넘어갔다. 특히 스위스로 넘어간 위그노들로 인해서 정밀 작업을 요하는 각종 산업이 급속히 성장한다. 대표적인 산업이 지금도 스위스를 대표하는 시계 제조 산업이다.

 

▶ 헨리 8세(Henry Henry VIII, 1491-1547, 잉글랜드의 국왕) 아버지 헨리 7세의 뒤를 이어 튜더 왕조의 두 번째 잉글랜드 국왕이다. 그의 타고난 바람기로 6번이나 결혼을 한 인물이나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고 절대왕정을 확립하는 큰 업적을 이루었다.

 

바다건너 영국에서는 전혀 새로운 계기로 종교개혁이 일어난다. 당시 국왕 헨리 8세가 영국의 종교개혁을 이끌었는데, 정부인과의 이혼을 금지한 로마 가톨릭에 대항하여 새로운 종파를 건설하게 된다. 헨리 8세는 1491년에 태어나 1509년부터 잉글랜드 국왕으로 재위한다. 그의 부인은 연상의 카스티야(지금 스페인 지역의 왕국) 왕족 캐서린이었는데, 그녀는 헨리 8세보다 먼저 그의 형과 결혼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형이 요절하자 정치적, 외교적 상황에 의해 동생인 헨리 8세와 억지 결혼을 하게 된다. 헨리 8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대륙에서 불고 있었던 종교개혁에 대해 강하게 부정하고 있었으나, 캐서린의 몸종 엔 불린과 눈이 맞아 정부인인 캐서린과 이혼, 정확히는 결혼 무효를 허락받으려고 로마의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청원하였으나 거절당한다. 그러면서 로마교황청과 극한 대립을 이루며 1534년 수장령을 통해 영국국교회를 설립하고 스스로를 수장으로 공표한다. 우리나라의 성공회가 영국국교회이다. 재밌는 것은 헨리 8세가 극한의 바람둥이였는데 그렇게 좋다고 따라다니면서 로마교황청과의 대립을 이루면서까지 정부인과 이혼을 하고 재혼을 하게 된 앤 불린을 죽여 버린다. 앤 불린은 헨리 8세와 처음에는 알콩달콩 잘 지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헨리의 바람기가 작동하여 눈물과 격노의 세월을 보냈고, 아들을 원하는 헨리 8세의 소원을 들어주지 못하고 여러 번의 사산과 상상 임신 등으로 고통을 받으며 살았다. 결국 헨리 8세는 그녀를 근친상간 및 반역을 조장했다는 죄목으로 처형하였다.

▶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1603, 제위 1558-1603) 헨리 8세와 엔 불린 사이에 딸이 있었는데 그녀는 훗날 엘리자베스 1세로 왕위에 오르며 영국의 최전성기를 이룬 군주로 남는다. 그녀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는데, 그 이유가 지긋지긋한 부모의 운명때문이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녀의 계부였던 토마스 시모어의 성적 학대가 직접적인 원인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녀가 한창 사춘기 시절에 시모어 집안에서 양육되었는데 토마스는 엘리자베스의 침대에 올라가 몸을 만지고 엉덩이를 때리는 등의 행동뿐만 아니라 엘리자베스의 옷을 수많은 조각으로 찢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를 본 그녀의 계모 캐서린 파는 엘리자베스를 쫓아내 이 사태를 마무리한다. 엥? 토마스가 아니라 엘리자베스를 쫓아냈다고?!?!

 

한편 헨리 8세의 뒤를 이어 세 번째 부인인 제인 시무어와의 사이에 에드워드 6세가 왕이 되고 얼마 안 가 헨리 8세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캐서린이 낳은 장녀 메리 1세가 왕위를 물려받는다. 메리 1세가 다시 가톨릭으로 회귀하며 신교도들을 탄압하자 그들은 신교의 성지 제네바로 망명을 하게 된다. 거기서 신교도들은 칼뱅주의에 심취하게 되고 엘리자베스 1세에 의해 다시 신교가 복원되자 영국으로 돌아와 순결과 복음 중심주의를 바탕으로 국교회의 개혁 작업을 주도하게 된다. 그런 과정에서 영국에서 잔존하였던 국교회들과 마찰을 겪게 된다. 국교회들은 거친 개혁의 바람을 일으키는 칼뱅주의자들에게 '더럽게 깨끗한 척하는 사람들', 즉 Puritan으로 부르며 개신교 내에서도 다른 종파인 청교도가 탄생하게 된다. 이들은 영국의 새로운 왕조인 스튜어트 왕조가 들어서면서 국교회를 강화하고 청교도는 압박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청교도들은 영국에서 신교와 구교 모두에게 탄압당하며 결국 미국으로 건너가 극한의 자본주의를 발전시키게 된다.

 

Daddy’s Point of View ==================

유일신 종교는 시간이 지나면서 참으로 많은 종파로 갈려지게 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 가족은 종교가 없지만 역사, 특히 서양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종교의 전개 과정을 알아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는 기독교, 정확히 얘기하면 신교 프로테스탄트, 불교, 카톨릭 등이 주요 종교로 남아 있다. 종교는 사람을이 만들어 낸 것이나 다름 없지만 실제로 사람을 지배하고 있다. 유물론에 가까운 아빠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 종교지만 우리도 어떻게 될지 모르지 않은가. 언젠가는 우리의 정신을 어떤 신적인 존재에 의지하고 있을 지도 모르는 때가 오지 않을까. 정신적으로 성숙하고 건강한 상태를 유지한다면 굳이 종교가 없어도 된다고 생각한다. 불안한 현실과 막연한 미래에 대한 도피로 종교에 귀의하지만 현실적인 감각과 과학적 사고를 가지고 무장한다면 종교가 우리를 넘어가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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